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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영원과 찰나

영원(永遠, Eternal).

길고 긴 시간 속, 많은 필멸자(必滅者)들이 손에 넣기를 갈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시황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권력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원해 수은으로 만든 불사의 단약을 먹고, 자신을 대신해 죽어줄 산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 희생시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불로불사의 비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과 재물을 아낌없이 쏟아넣었다.

 

영원한 권력을 추구한 이들은 머리 위의 왕관을 지키기 위해 독재와 폭정을 일삼았다. 그것도 모자라 죽은 뒤 사후세계에서도 그 권력을 누리고자 살아있는 이들을 데리고 함께 무덤으로 들어갔다. 살아있는 자들은 그 권력자의 욕망 앞에 죽임을 당하며 죽어서까지 그의 수발을 들기 위해 무덤에 묻히고, 더 잔인하게는 산 채로 순장되기도 하였다.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연인으로서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그들은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낳아 세상에 초대하며 그를 영원한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자신의 유한한 생명을 영원으로 이어가고자 많은 생물들이 짝짓기를 통해 후손을 만들며 찰나(刹那)에 불과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영원을 꿈꾸며 DNA를 남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찰나를 살아가면서도 본능적으로 영원을 추구하며,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영원을 얻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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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많은 이들은 착각한다. 언젠가 모든 것은 끝이 나기 마련이며, 모든 생명들 또한 유한한 시간 속에 허락된 찰나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귀찮으니 예전에 써놓았던 글을 가져와 설명하고 이어가도록 하겠다. 물론 3차원 물질계의 필멸자로서 어디까지 섭리를 옮겨 적을 수 있을지는 자산이 없다만, 적어도 내 안에 자리한 개념을 최대한 인간의 언어로 끌어내 번역해보도록 하겠다.

 

◆진리 탐구 메모 https://shearestis.tistory.com/98

 

진리 탐구 메모

트리니티 시스템 (The Trinity System: Providence)이건 어릴적부터 내가 감으로 느껴오던 것을 2025년 12월 4째주 일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누워있다가 할 일이 없어서 대충 끄적여 언어화한 낙서임.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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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찰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성을 지닌다. 영원은 수없이 많은 찰나의 연속이며, 찰나는 영원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작에는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며, 끝이 있어야 비로소 또다른 시작이 가능하다. 이것을 형상화한 것이 우로보로스, 시작과 끝의 뱀이다. 이미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악역 중, 호문쿨루스(Homunculus)의 몸에 새겨진 문양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으며, 이별은 다시 재회라는 이름의 만남과 완전히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을 불러오기도 한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다. 물론 무조건 이 정해진 과정을 따라서 끝을 맞이하지만은 않는다. 태어난 것에는 순서가 있으나 죽는 것에는 순서가 없다고, 젊은이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인해 나이를 먹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천수를 누리고 가는 것은 아니지만, 태어난 존재는 모두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운명을 갖고 있다. 각각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를 뿐,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음을 맞이한 영혼은 윤회(輪廻)의 굴레 속 섭리의 흐름에 따라 다시 태어나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명 또한 그렇다. 모든 문명은 시작하여 황금기를 맞이해 눈부신 시간 속에 그 자태를 뽐냈으나, 쇠퇴하여 결국은 스러져 멸망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문명은 그저 붕괴하고 끝이 아니였다. 항상 문명의 붕괴 후 암흑기를 거쳐 새로운 문명이 고개를 들었고, 이 흐름은 언제나 역사 속에서 몇번이고 반복되었던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문명 역시 언젠가는 스러질 것이다. 이 또한 섭리의 일부이니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 끝은 반드시 찾아온다.

 

영원을 얻고자 한 이들은 많았으나, 많은 이들은 찰나의 시간 속에 영원을 얻지 못한 채 스러져갔다. 이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기에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먼저 태어난 이가 세상을 차지하고 있다 뒤에 오는 이에게 넘겨주고 그는 세상에서 퇴장한다. 그것이 탄생과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영원을 원했지만 결국 손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원은 필멸자에게도 허락된 것임을 많은 이들은 모르고 있다. 영원은 언제나 우리 속에 존재하며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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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갖고 싶은 이들은 영원이 무엇인지 그 본질에 대해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영원을 살고 있으며, 영원을 얻은 이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은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우시아(Ousia / οὐσία), 로고스(Logos / λόγος)의 균형 속에 존재할 수 있음을 먼저 언급하겠다. 또한, 영원은 단 하나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수없이 많은 형태 속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부터 설명할 영원의 개념은 어쩌면 난해할 수도 있기에 미리 영원의 뼈대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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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손에 얻은 이들, 그들은 역사 속 수없이 많은 거인들이다. 난세의 영웅, 치세의 왕과 군주, 학문과 기술을 갈고닦은 위인들을 비롯해 역사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신의 존재를 새기는데 성공한 이들은 영원을 손에 넣었다.

 

물론 이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기억되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기억되는 이라 하여도 역사 속 폭군과 범죄자, 악인들은 영원을 손에 얻었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누군가의 기억 속, 역사 속에 박제(剝製)되어 그들의 악행만을 기억당하며 후세의 사람들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의 영으로서의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는 박리(剝離)당했고, 그의 인생이라는 우시아는 그의 악행에 의해 철저히 부정(否定)당한다. 그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는 모든 이들에게 저열한 것이라 비난 속에 철저히 외면(外面)당한다.

 

필멸자의 영원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그의 존재를 긍정함과 동시에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를 기억하며 그가 남긴 족적(足跡)이 세계에 끼친 영향과 후세에 이어져 남긴 것이 영원을 만들어낸다. 남겨진 이들, 뒤에 오는 이들은 먼저 와 떠나간 이를 두고 그의 프네우마가 가진 영의 빛을 쬐며 살아갈 것이다. 그의 우시아 속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그의 삶을 본받고 그와 같은 거인이 되고자 할 것이다. 그가 남긴 로고스를 지도 삼아 그가 갔던 길을 따라가며, 그 길 너머의 또다른 세상을 이어 나아갈 것이다.

 

역사 속 거인들은 자신의 인생을 바쳐 갈고 닦아낸 어떤 위업을 통해 영원을 손에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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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은 영원을 가질 자격이 없는가? 아니다. 그들 역시 영원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으며 실제로 영원을 손에 넣었다. 그저 그들은 자신들이 영원을 손에 넣었음을 알지 못한 채 죽었던 것 뿐이다.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사랑, 남녀가 하나 됨에서 오는 사랑, 형제자매간에 우애 넘치게 아끼는 사랑, 친구관계 속 우정으로 엮이는 사랑, 사제(師弟) 관계와 선후배 관계 속의 존경과 배려로 이어지는 사랑 등이 그러하다.

 

사랑은 필멸자를 불멸자로 만드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마법이자 이 세상의 근간이 되는 섭리의 근원이기도 하다. 사랑을 하기에 존재를 긍정하며,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 역시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위에서 말하였듯이 영원은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의 균형 속에 존재하며 사랑 또한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의 조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하겠다.

남녀 간의 연애 속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느냐며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신을 거절한 상대에게 앙심을 품고 폭력을 가하는 것을 사랑이라 여기지 않는다. 이는 사랑을 훼손하고 모욕한 행위이며, 그 사랑이 품은 프네우마는 빛을 잃고, 우시아는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며, 로고스는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 속에서 첫 단추부터 잘못된 애초부터 글러먹은 설계도에 불과한 것이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 역시 위와 동일하다. 원치 않은 존재로서의 부모자식관계나 계획되지 않았던 부모자식관계, 부모가 수단으로서 낳은 자식 등이 그러하다. 사랑은 선순환 구조여야 하는데 부모가 시작부터 원치 않았던 존재, 누구나 다 있으니까 나도 하나 가져야지 하는 수단으로서의 자식, 부부 사이의 권태기나 이혼 위기를 넘겨줄 수단으로서 낳음당한 이의 사랑은 사랑이라 여길 수 없다. 그 속에서 사랑으로 변모할 가능성은 있겠지만, 시작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이것은 노력여하에 따라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의 균형을 이루는 사랑으로서 성립될 수 있지만, 이 역시 매우 피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건 솔직히 구구절절 더이상 잘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예전에 써둔 글을 이용해 마저 이어가도록 하겠다. 변명을 하자면, 모든 세상의 근간인 사랑의 일부이긴 해도 사랑 자체를 논하는 것에 고작 글자 몇줄 갖고 퉁칠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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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아이가 있는 지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벌써 몇달도 더 전의 이야기이므로. 하지만 아이 엄마는 뱃속의 태아가 딸이 아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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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떤 존재를 두고 보답받기를 바라지 않고 그저 베풀고 싶은 마음이 앞서며, 그에게 주는 것이 아깝지 않은 마음 그 자체이다. 그와 동시에 사랑은 선순환으로서 피드백이 필요하며, 보답을 바라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그 사랑을 받고 고맙게 여기지 않고 당연히 여겨 다른 쪽을 착취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마땅히 가져야할 선순환 구조가 성립할 수 없어 유한한 한계를 가지게 된다. 사랑은 양자역학과도 같은 것이라 감히 말해보겠다.

 

또한 사랑을 보낸다 하여 상대방이 그 사랑을 거절하는 것을 두고 분노와 수치를 느낀다면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다. 보낸 사랑이 상대에게 분노와 수치를 주는 것 역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설명이 너무 어려우면, 흔히 말하는 ‘고백공격’ 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

 

영원은 자유(自由, Liberty)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되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영원을 가능케 하는 자유는 방종(放縱, Abandon)과 동일하지 않으며,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영원한 존재가 될지, 아니면 영원에 잡아먹힌 노예가 될지가 정해진다.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는 것을 설명하기 앞서 아래에 글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https://shearestis.tistory.com/101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팍스 로마나를 붕괴시킨 트리거는 로마인의 타락이였다.그들은 각종 신비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졌고, 더불어 그 끝에는 지금 우리가 부르는 LGBTQ까지 향락주의의 일부로 귀족과 지배계급들의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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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에 만들어진 세속적 종교 https://shearestis.tistory.com/112

 

21세기에 만들어진 세속적 종교

20세기까지는 세상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그 시절에는 비록 부족하고, 없고, 많이 미숙하고 곤란한 시대였지만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 내 이웃과 친구, 동료와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이 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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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인을 짓밟는 난쟁이 https://shearestis.tistory.com/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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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하다보면 본의아니게 이상한 이야기들을 많이 주워듣게 되는 것 같다.보다보면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요상한 신조어(新造語, Neologism)가 넘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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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세상에는 참 듣기 좋은 말이 많다. “너는 소중해”, “네 기분이 곧 법이다” 와 같이 인간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삭제한 채 감성(Pathos,πάθος) 만을 자극하는 비논리적인 포장지로 둘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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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리만 남고 의무는 내팽개친 시대 https://shearestis.tistory.com/123

 

권리만 남고 의무는 내팽개친 시대

농담으로라도 듣기 싫은 말이 있다. “아무튼 해줘.”“몰라, 그냥 해줘”“그냥 줘.”“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줘.”“아무 노력 없이 갖고싶다.”“노력 없이 이기고싶다.” 듣기만 해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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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고싶다고 모두 가질 순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5

 

갖고싶다고 모두 가질 순 없다

TV 속에 종종 나오는 비혼모가 있다.정자 기증을 통해 낳은 아이를 데리고 육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데, 아이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엄마의 뱃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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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가치를 왜곡하는 질투

세상에는 다양한 재능이 있다. 누군가는 글을 잘 쓰고,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리며, 누군가는 머리가 뛰어나고, 누군가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뛰어나며, 누군가는 음악에 재능을 갖고 있다.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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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9

 

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καλοκαγαθία)그리스어(헬라어)로 아름다움(Kalon, καλός)과 선함, 탁월함(Agathon, ἀγαθός)를 합쳐 만든 단어로, 육체적 아름다움(외면)과 정신적 덕(내면)이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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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빵에는 죄가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30

 

그 빵에는 죄가 없다

SNS상에서 어떤 사람이 사이버불링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논란이 되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SNS에 게시했다는 이유만으로, 글의 게시자는 그들의 선전용(宣傳, Propaganda) 우상(偶像, Idol)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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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의 가면을 쓴 찬탈자 https://shearestis.tistory.com/131

 

피해자의 가면을 쓴 찬탈자

야생에서 약한 개체는 도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이지는 않다.가장 약한 인간은 지능 스탯에 모든 포인트를 올인(All in)했고, 지구의 지배종으로 거듭났다. 인간은 약한 자를 내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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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심연은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34

 

결국 심연은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오늘도 즐겁게 새로운 게임 정보가 있나 공식 계정을 보기 위해 SNS에 로그인을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의 특이한 친구는 몇년 전 어느 순간부터 정치활동과 인권운동 등에 푹 빠져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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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라고 써둔 글들이 좀 많다. 그렇지만 하나같이 필요한 조각을 하나하나 써둔 글들이기에 가져왔다. 이미 나는 자유와 방종에 대해 끊임없이 지겹도록 거듭해서 설명했던 것 같다. 더 설명을 해야하나 싶을정도로 많이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유는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의 균형 속의 자유 그 자체를 의미한다. 법으로도 정의된 자유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질서(秩序, Order)와 절제(節制, Temperance)를 지키며 누리는 자유는 자유의 바른 형태이자 정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질서와 절제는 언제나 섭리의 이치 위에서 굴러간다.

 

방종은 이와 반대로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를 붕괴시키고 하고싶다면 질서와 절제를 깨고 사회를 혼란 속에 빠뜨리며 자신만의 만족을 추구하고 타자(他者)와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 행동을 말한다. 이것은 자유라는 이름 속에 행해지는 심각한 오류이며, 이는 영원 그 자체를 파괴하는 동시에 존재의 파괴까지 불러오는 위험천만한 행위이다. 섭리는 우리에게 자유로울 의지로서의 프네우마와 자유를 누릴 존재로서의 우시아, 자유와 방종을 구분할 로고스를 주었기 때문에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여 방종하게 굴어 섭리를 거스르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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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은 비워냄과 채워냄의 연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원을 추구해 온갖 기행을 저질렀던, 역사에 기록된 이들의 기이하기 짝이 없는 행보 속에도 그들은 결코 영원을 손에 넣지 못했다. 오히려 영원을 손에 넣은 것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에 따라 손에 쥔 것을 버리고, ‘나’를 채우던 것을 비워내는데 성공한 이들이였다. 그들은 가진 것을 버리고 비워냄에 따라 공(空)의 경지를 실천하는데 성공했고, 그에 따라 그들이 비워낸 자리에 섭리의 이치가 채워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채워짐을 넘어서 넘쳐 흐르는 진리 속에 사랑을 깨닫고 거대한 존재로서 초월자가 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위대한 성자라 여기는 많은 성인(聖人)들이 그러하다. 대표적으로 말하자면 고타마 싯다르타, 우리가 아는 ‘부처님’ 같은 존재들이 이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부처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공의 경지에 이르러 흩어진다고 하였다만,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3차원의 세계에서 감히 깨달음을 언어로서 논하고자 하여 벌어진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은 초월적 존재가 됨으로서 그 존재는 3차원에 얽매이지 않고 섭리의 가장 높은 차원에 다다르며 어디에든 존재하는 상태를 이룬다. 그에 따라 그는 하나이며 여럿, 여럿이면서 하나인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으며 그는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고 어디에든 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을 손에 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섭리의 가장 근원에 해당하는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다.

 

영원은 바랄수록 가질 수 없으나, 그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찰나에 충실할수록 가까워지는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은 멀고도 가까운 곳에 있으며, 가까우면서도 먼 곳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영원은 고정과 정지된 상태가 아닌,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영원하고자 섭리를 거슬러 허락되지 않은 끝없는 수명, 영원한 젊음을 추구하는 것은 그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생명과 존재, 그리고 종족은 섭리의 안배에 따라 각자에게 허락된 형태의 영원을 지니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가며 끝없이 변화하는 것 역시 영원이 가진 또 하나의 모습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경험을 갖지 못하며,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갖지 못하던 무지(無知)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기억을 지운대도 이미 섭리 속, 시간 속,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연과 그로 인한 관측에 따라 어제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억을 잃은 자는 평온이 아닌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로 가는 과정이지만 내일의 ‘나’ 그 자체는 되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 속 기억과 경험을 쌓아 내일에 다다러서야 비로소 내일의 ‘나’가 완성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제, 오늘, 내일의 ‘나’는 별개의 존재가 되지도 않는다. 끝없이 변화하는 ‘나’ 그 자체가 영원으로 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에서 설명하였듯 윤회의 원리에 따라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것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기에 지난 생의 ‘나’는 이번 생의 ‘나’와 다른 인격을 지니되 같은 혼을 공유하여 영원한 존재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 생의 ‘나’ 역시 다음 생의 ‘나’로 이어져 또다시 영원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게 된다. 어제, 오늘, 내일의 ‘나’ 가 동일한 존재이듯, 지난 생, 이번 생, 다음 생의 ‘나’ 역시도 동일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은 태초부터 섭리가 넣어준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의 빛을 품고 있기에 그 빛이 영원히 빛나고 있다면 그는 영원불멸하기 때문이다.

 

영원은 멈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끝없는 변화 그 자체인 것이다.

 

◈◈◈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허공에 손을 저어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영원은 그렇게해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다.

 

영원을 얻고자 한다면 온토스(Ontos / Ὄντος)에 주목하기를 추천한다.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의 균형은 곧 온토스의 발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온토스는 상태이며, 세 요소 중 단 하나라도 붕괴하면 온토스는 발현되지 않는다.

 

영원을 논하는 것에 사랑과 자유는 빼놓을 수 없겠으나, 이것은 단지 영원의 일부인 것이다. 사랑을 논함에 있어 영원과 자유를 빼놓을 수 없으니 이 또한 사랑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자유를 논함에 있어 사랑과 영원을 빼놓을 수 없으니 그 역시 자유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쉽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 사랑, 기억, 힘, 순환, 이치

● 우시아(Ousia / οὐσία) : 영원, 찰나, 영속(永續), 축(軸, Axis), 절제

● 로고스(Logos / λόγος) : 자유, 변화, 연속, 의지, 질서

 

물론 여기 써져있는 개념들만이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빙산의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는 일부만을 갖고 영원을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개념이나마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원의 끝자락조차 잡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며, 자신에게 허락된 영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섭리의 가장 높은 이치이자 근원인 사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사랑을 알고 행함에 있어 영원을 추구할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섭리는 찰나 속에 수없이 많은 사랑을 심어놓았다. 그 찰나를 살아가며 사랑의 보물찾기를 즐기는 것이 곧 영원으로 향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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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찰나: 고라니 목장

영원(永遠, Eternal). 길고 긴 시간 속, 많은 필멸자(必滅者)들이들이 손에 넣기를 갈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시황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권력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원해 수은으로 만든 불사의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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