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 듣기 좋은 말이 많다.
“너는 소중해”, “네 기분이 곧 법이다” 와 같이 인간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삭제한 채 감성(Pathos,πάθος) 만을 자극하는 비논리적인 포장지로 둘둘 말아 감싸낸 말들이 21세기의 흐름을 타고 범람하고 있다.
하지만 이 흐름은 결코 옳지 않다.
듣기 좋은 말은 달콤할지언정 결국 우리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잊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오물 속에 몸을 던져 뒹굴며 그것이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이자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치라고 착각하며 존엄해야할 스스로의 존재를 깎아내리고 시궁창에 던져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겠지만, 처음에는 당신을 화나게 할 것이다(The truth will set you free, but first it will make you miserable)
프리드리히 니체 또한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사람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환상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대중의 근거 없는) 확신이다"
플라톤 역시 동굴의 비유로서 이렇게 말하였다. "동굴 안의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를 진실이라 믿는다. 누군가 진짜 태양(진실)을 보고 돌아와 말해주면, 그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죽이려 들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진실이 받아들여지는 3단계를 이렇게 말하였다.
처음엔 조롱당하며, 두번째에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마지막에는 결국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은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을 좋아하고 그것을 신성시하고 숭배하려 든다.
듣기 좋은 말 속에 들어있는 독극물과 녹이 잔뜩 묻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칼날을 무시한 채 그 겉면을 감싸고 있는 예쁜 포장지만을 두고 “이것이 진리다!” 라고 외치며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에 자신이 빠져있는 줄도 모른 채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을 알고 거부하는 자를 ‘차별주의자(Discriminator)’ 혹은 ‘혐오주의자(Hater)’ 라는 말로 매도하며 유럽 중세시대에나 존재했을 화형대를 인터넷상에 설치하고 그것에 묶은 뒤 좌표를 찍고는 많은 우매한 군중에게 돌을 던지고 불을 붙이라고 외친다.
그럼 또 그 우매한 군중들은 스스로 사유(思惟)하는 힘을 잃은 채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이의 외침에 따라 생각없이 돌을 들고 불을 붙이며 누군가를 조롱하고 욕하는 일에 심취해 자신들이 정의로운 일을 하고있다고 착각한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이성과 자신만의 철학조차 없는 어리석은 난쟁이들이 어둠 속에 앉아있던 거인의 씨앗을 품은 이가 눈을 뜨려 한다며 다같이 몰려가 짓밟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그토록 거부하고 죄악시하는 행위인 줄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하고있는 반지성주의적 행보는, 사실 그들이 괴물이라 부르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을. 스스로가 괴물인 줄도 모른 채 괴물이 아닌 이를 괴물로 매도하고 죽인 뒤 자신들이 ‘인간(Human)’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있는줄은 알고 있을까?
왜 사람들이 난민을 거부하는지 생각하려 들지도 않는다.
무분별하게 난민을 받아들인 유럽이 현재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직면하고 있는지, 유럽인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유럽 사회가 어떻게 붕괴당했는지 충분히 찾아보면 정보는 차고 넘친다.
뉴스와 신문, 인터넷 기사, 실제 유럽인들의 삶을 담은 당사자들의 글과 제보, SNS, 유튜브와 같은 매체만 참고하더라도 얼마든지 정보를 모을 수 있다.
이 현상에 대해 연구한 학자와 연구소들이 펴낸 수많은 논문과 데이터들만 조사해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차별을 하기위해 난민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거부를 해야할만한 이유가 차고 넘치기에 사회의 구성원들은 난민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이 차별이라는 라벨(Label)이 붙었을 뿐인 것이다.
단지 수없이 많은 평범한 시민들은 내 가족, 내 나라, 내 공동체를 지키고 평화롭게 살고싶어 용기를 내서 반대의 목소리를 냈음에도 단지 저들은 ‘정의로운 우리들의 기분’을 거슬렀다는 이유만으로 이 수없이 많은 사회의 톱니바퀴와 기둥들을 향해 차별주의자니 혐오주의자니 하는 라벨링(Labeling)을 시도하며 자신들이 가진 가짜 로고스를 진리인 마냥 포장해 흉기처럼 휘두르는 것이다.
왜 고대부터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LGBTQ라는 것을 죄악시하고 금기로 여겼는지에 대해 생각하려 들지도 않는다.
과거의 인간들이 우리보다 멍청하고 미개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길 거부하였던 것이 아니다.
현재의 인간들 역시 덜 계몽이 되었기에 ‘다양성’ 이라는 라벨을 붙인 이 비정상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DNA에 새겨져있는 본능에 따라, 그리고 실제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붕괴시킨 역사를 인간이 기억하기에, 그것이 생물학적 상수(常數, Biological constant)를 왜곡하고 사회의 기준을 무너뜨리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고 배척하여 문명의 기둥을 지키고 사회를 혼란시킬 수 있는 기생충을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
변수(變數, Variable)가 상수가 될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단지 변수가 상수인 척(pretending)을 하고 있는 것을 PC주의자들은 상수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기분에 따라 변하는 것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어떻게 상수라는 말인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어떻게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 될 기준이 세상의 잣대가 된다면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걸까? 아마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는 신뢰라는 자산이 증발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숨쉬듯이 달라지는 기준과 그 기준을 만들어내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결국 사회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성기훼손수술을 받은 이들은 영원히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괴물로 전락한 자신의 몸을 보고 절망하고 있으며, 현재에 와서는 그 위험한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각 국가에서 앞다퉈 강력한 제한을 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동성애 권리 운동가들은 APA 연례 회의를 습격하고 연설을 방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로 인해 How를 논해야 하는 과학과 의학은 그 난잡한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에게 결정권을 넘겨줘야만 했다.
이에 압박을 느낀 APA 이사회가 1973년 삭제를 결정했고, 1974년 전체 회원 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하게 되었다. How를 논해야 하는 과학이 Why를 논하기로 결정하면서 이성과 논리를 버리고 비이성적인 자들 앞에 절대 넘겨줘서는 안 되었을 학문적 가치와 주권을 빼앗긴 것이다.
그로 인해 이 영역은 '신성불가침' 이라는 속성을 부여받고, 추가적인 연구를 하려 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가 그들의 책상을 박살내고 종이를 찢고 잉크를 쏟아버리는 것을 정당한 집행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질서를 수호해야할 로고스(Logos / λόγος)가 어떻게 무질서(Entropy)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단 말인가!
광기어린 이들이 감히 과학이 논해야 할 How를 빼앗아버린 탓에 오히려 치료와 학문적 연구라는 길이 봉쇄된 것이다. 누군가는 치료를 받아 정상적인 삶을 되찾을 권리를 빼앗겼으며, 누군가는 지식을 향한 탐구와 학문의 발전을 금지당한 것이다.
NARTH (National Association for Research & Therapy of Homosexuality)와 같은 일부 연구자와 학자들의 지성적인 시도조차 차별(discrimination)과 혐오(Hate)라는 라벨을 붙여 이단으로 매도하며 그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다양성’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짓밟으려 든다. 그들의 논리대로면 이러한 시도조차 하나의 다양성인데도 말이다. 단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다고 짓밟는다니, 그야말로 PC하지 못한 행태가 아닌가?
다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그저 무지몽매한 자들의 어리석은 외침이라고 여기며 현실을 직시하려 들지도 않는다.
실제로 매매혼으로 인해 사회에 생겨난 다양한 분야의 문제들이라는 데이터를 두고도 눈을 가린 채 “차별은 나빠!” 라며 어린애처럼 징징대고 자신의 ‘착한’ 기분만을 주장하며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을 박살내려고 하는 것이다. 정작 그 기둥이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안전함 속에서 감히 이렇게 어리석고 위험한 ‘기분’에만 휘둘리며 철없게 구는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아니, 모를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알려고 하지 않는 것 뿐일테니까.
극단적인 환경단체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각종 퍼포먼스를 하면서 대중을 욕하고 있다.
사람들이 멍청하고 잔인해서 육식을 하고, 석유와 석탄을 사용해 살아간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
인간은 원래 잡식성으로 만들어진 종족이며 풀만 먹고는 살아갈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고기를 아예 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도살되어야 하는 동물들이 가엾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연의 법칙 속 먹이사슬에 따라 우리가 그들을 먹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많은 가축들의 동물권침해와 인간의 손에 의해 정해진 운명과 죽음은 비극적인 일이 맞다.
이 오래된 슬픔의 연쇄가 슬프다고 하여 갑자기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히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감만 살 뿐더러, 그런다고 고기를 먹는 이들이 사라지지도 않고 동물들의 고통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차라리 누군가를 비난할 시간을 배양육이나 대체육 연구에 할애해 적극적으로 가축을 도살하지 않고도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확보하여 고기를 먹는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윤리적이지 않은가? 왜 쓸데없는 분란만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을 박살내려 하는지 모르겠다. 그 기둥이 쓰러진 자리에 무엇을 대체품으로 넣을지에 대해 고려하지도 않고 무작정 기둥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기둥을 악으로 매도하고 박살내는 것에만 집중한다니, 무지에서 온 비대한 자아는 참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석유와 석탄을 이용해 우리 인류가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을 시작으로 인류세에 길이 기억될 한 획을 그었고, 그에 따라 눈부시게 발전한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음을 모든 이들이 안다.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타는 차, 우리가 살면서 사용하는 에너지 등의 수단들이 석유와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Fossil Fuel)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있기에 지금 인간들은 스마트폰으로 손가락 한번 움직이면 뭐든지 손에 넣고, 어디에 사는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으며, 방에 편하게 앉아 온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인간들은 평생을 걸어가도 가지 못했을 지구 반대편의 세상에, 비행기 한번 타고 몇시간만 기다리면 손쉽게 도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산업혁명과 화석연료가 지구를 아프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구온난화는 현실로 다가왔고, 임계점을 넘어서 지구에 사는 많은 생명과 우리를 품어준 자연을 병들게 하고 있다.
당장에라도 화석연료의 사용을 끊는다면 지구는 그 놀라운 자정능력(自淨能力, self-cleaning ability)을 이용해 다시 푸른빛 우리들의 낙원으로 돌아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탁상공론이자 이상론(理想論)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멈출 수 없는것이다. 대체제가 완벽하게 나오지 않은 이상 사람들은 쉽게 멈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플라스틱을 덜 쓰려고 텀블러와 장바구니를 들고다니며, 전기를 아끼기 위해 안 쓰는 가전제품의 코드를 뽑고 멀티탭의 스위치를 누르며 방의 전등을 끈다.
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속 바다거북이의 코에 인간들이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빨대가 박혀있는 것을 TV로 보고 충격을 받아 핸드백 속에 항상 작은 가위를 들고 다닌다. 그러다 밖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할 일이 생기면 사용한 빨대를 세로로 길게 주욱 잘라 반으로 가르고 묶어서 버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쓰레기 자체를 줄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빨대가 바다로 들어가 바다거북의 코에 박히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한 인간의 미력한 몸부림인 것이다.
내가 대단하고 도덕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환경단체가 쓸데없이 박물관에 들어가서 옛 예술가들이 남긴 아름다운 작품에 페인트를 끼얹거나, 모든 이들이 즐기는 광장 한가운데 설치된 분수에 검은 염료를 뿌린다던가, 손에 강력접착제(그것도 석유로 만들었답니다)를 바르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자동차들의 통행을 막는 짓보다는 생산적이라고 하고싶은 것이다. 실제로 아스팔트에 앉아 도로를 점거한 환경단체 때문에 응급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지나가지 못했고, 결국 환자는 죽게 되었던 사연이 있다.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를 태운 남편 역시 도로를 점거한 이들에게 엎드려 눈물로 애원했으나 그들이 비켜주지 않았던 사연도 보도된 적이 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불편을 줘서 계몽을 하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으나, 방법이 너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협박하고 매도하고 불편을 줘서 반감을 사지 말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봉사자들이 다같이 모여서 쓰레기가 가득한 숲을 청소하는 모습을 SNS로 찍어 공유하고, 그들이 모아온 폐기물을 재활용할 기술을 연구해서 세상에 도움을 주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조차도 하고싶지 않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플라스틱과 화석연료를 사용한 문명의 이기를 전부 내려놓고 자연 속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 하나만이라도 만들어낼 평생의 환경오염 1인분을 삭제하는 선택이라도 하는게 옳지 않을까 한다.
옛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매해서 선해보이는 것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며 선함을 추구하고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태어나 이어져왔던 역사를 이어받은 현재 21세기 속 우리들도 같은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악마는 언제나 선함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와 달콤한 말로 귓가에 우리가 듣고싶어하는 말을 속삭여 타락시키고는 했다.
PC주의는 마치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과 닮아있다. 중국의 홍위병(红卫兵, 紅衛兵)들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사구(四舊, 낡은 사상·문화·풍속·습관)'를 타파한다고 그들의 조상이 쌓아온 역사를 부정하며 유적과 유물을 파괴하고 불태웠던 것과 같이 PC주의자들도 '캔슬 컬처(Cancel Culture)'를 자행한다.
홍위병들이 당대의 지식인들과 자신의 부모를 공격했던 것처럼, PC주의자들도 떼거지로 몰려가 자신들과 다른 관점을 갖고 의견을 내는 자들을 향해 집단 린치(Lynching)를 가하고 SNS나 인터넷으로 좌표를 찍어가며 사이버불링(Cyberbullying)을 저지르는 것에 죄책감조차 갖지 않는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초토화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위 지도자와 지식인들을 잃은 중국은 결국 주저앉아 암흑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이득을 본 자는 홍위병이 아니라 홍위병을 이용해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였다. 홍위병들은 사냥이 끝나자마자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해 지방과 시골 깡촌으로(상산하향운동, 上山下乡运动) 밀려나듯 쫓겨났다. 도시의 청년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 농민들과 함께 지내게 만듦으로서 그들이 가진 힘을 강제로 꺾고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버린 것이다.
아마도 PC주의자들은 그들을 조종하던 이들이 자신이 얻고자 한 바를 얻고 난 뒤에 홍위병들처럼 토사구팽 당할 것이리라.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기 마련이므로.
이렇게 말하면 PC주의는 좋은 뜻에서 시작되었다 할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도 처음엔 좋은 뜻에서 시작되었는데 왜 욕을 먹는 것인가?
의도가 결과를 정당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스템 설계에서 중요한 것은 코드가 가진 '의도'가 아니라, 그 코드가 실제로 돌아갔을 때 발생하는 런타임 에러(Runtime Error)인 것이다.
설계자가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디자인의 건물을 그렸더라도 역학 계산(논리)이 틀려 건물이 붕괴해 사람이 깔려 죽는다면, 설계자는 살인자가 되어버린다.
맛있는 음식으로 손님들을 기쁘게 해주겠다고 독을 섞어 맛을 내고 색을 입혀낸 요리를 판매한다고 요리가 무독(無毒)이 되거나 건강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착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아이에게 메스(mes)를 건네주고 사람을 고치라고 하는 것은 선한 의도가 아니라 무책임한 난도질을 종용하는 것과 같다.에러(Runtime Error)인 것이다.
바보라서 차별주의자와 혐오주의자가 되는게 아니다.
그건 단지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이들이 사람들에게 붙인 또하나의 꼬리표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사상을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설정한 뒤 그것에 걸맞지 않은 이들을 도륙하고 마녀사냥 하는 또다른 차별주의자이자 혐오주의자에 불과하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증오하고 경멸한 모습의 괴물이 정작 그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세상과 다른 자신들의 생각을 수용해주길 바라면서, 정작 세상의 다른 의견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세상의 말을 듣지 않고 입을 막으려 한다.
왜 길고 긴 시간 역사 속에서 도덕과 윤리, 규범, 규칙이 존재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무작정 악으로 매도하고 미개한 옛 가치라 폄하하여 없애려고만 한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 것이고, 무엇이 되고싶으며, 그들이 때려부순 폐허 위에 무엇을 만들고 싶은 것일까?
또한 저들이 원하는 ‘다양성’은 대체 무엇이기에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혐오라는 라벨링을 당해야 하는것일까? 그들은 정말 다양성이라는 것을 사랑하고 있는걸까?
다양성 속에는 자신들과 다른 생각과 가치가 들어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있는것일까?
'사유의 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0) | 2026.02.25 |
|---|---|
| 권리만 남고 의무는 내팽개친 시대 (0) | 2026.02.24 |
| 아이가 주는 행복 (0) | 2026.02.22 |
|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0) | 2026.02.22 |
| 초대장을 보낼 권한 (0) | 2026.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