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독 인상깊게 기억이 나서 써보고자 한다.
엄마가 외출할 때 집에 물건을 하나 놓고온 일이 있었다. 사실 흔한 일이다. 그때마다 항상 나에게 전화하거나 현관에 서서는 급하게 갖다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있는데, 오늘도 평소처럼 나에게 잊고온 물건을 갖고와달라고 요구했다. 나도 함께 외출한 상태였기에 “동생에게 전화해서 가지고 내려오라고 말해두겠다.” 라고 제안했더니 엄마가 화를 내며 나더러 가져오라고 신경질을 냈다.
이 비효율적인 동선이 이해되지 않아서 동생한테 시키면 안되냐고 했더니 “너와 네 동생이 같으냐.” 라는 말을 들었고, 나 역시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아서 “뭐가 다른데? 왜 나는 되고 동생은 안 되는 거야? 걔한테 혹시 내가 모르는 병이나 장애가 있나?” 라고 순수한 궁금증에서 시작한 질문을 던졌고, 거기서 대화는 끊어졌다.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지만 딸만 있는 엄마는 사위를 함부로 대하고, 아들만 있는 엄마는 며느리를 함부로 대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악의가 없음에도 사위를 머슴처럼 부리거나 며느리를 하녀처럼 부리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아는 분 중에 딸만 있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 역시 딸이 결혼해서 생긴 사위를 머슴처럼 부리는 모습을 보았다. 가족여행에 꼭 기혼인 딸 부부와 동행해서 사위가 모든 궂은 일과 운전 등의 잡일을 처리하게 만드는 것이였다. 그 분이 악한 분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선한 분이였기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믿기 어려웠다. 아마 악의가 있어 사위를 머슴취급 한 것이 아니라 딸만 있었기에, 그리고 본능적으로 내 핏줄과 남을 구분하게 되어 본의아니게 차별한게 아닐까 싶다.
내가 살며 겪어온 차별은 위에서 언급한 사례와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럼 왜 딸과 아들을 모두 가진 엄마는 딸을 차별하며 하녀나 자신의 비서 혹은 분신으로 여겨 함부로 대하고, 아들은 애지중지 어화둥둥 아끼게 되는 것일까?
첫째가 딸이라서 둘째나 막내인 아들이 더 어리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첫째가 아들일때도 이런 경우를 꽤 많이 봤다. 동생인 딸에게 오빠의 식사를 챙겨주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케이스도 꽤 있었고.
내가 자식으로 태어나 딸로 살면서 길다면 긴 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엄마를 겪어보며 느낀 점을 말하자면, 엄마도 고작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의가 있어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의식적으로 쉬운 자식과 어려운 자식을 구분해 사람 봐가며 간 보듯 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만, 인간은 대부분 악하고 무지한 존재니까. 그것으로 엄마를 증오하기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라는 인간을 관찰하고 겪으며 자라왔기에 인간의 단편적이고 미숙한 면 하나만을 가지고 누군가를 판단할 수 없음을 안다.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고작 20살이 넘었다고 갑자기 어른이라는 표준 규격에 딱 떨어지는 인격, 성품, 능력을 갖추는게 아니다. 30도 채 되지 않는 나이 혹은 30이 조금 넘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똑같이 미숙한 인간과 만나서 멋도 모르고 남들 다 하니까 아이를 낳아서 허둥대며 기르다보니 성숙한 어른이 될 시간조차 놓쳐버리고 그저 하루하루 임기응변 속에 살아가는게 아닐까?
모든 엄마들 또한 딸이였고, 여자인데 일부러 자신과 같은 딸을 차별하고 아들이라고 더 사랑하려고 했던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살아온 세상과 인류의 역사 속 여자들이 가져왔던 ‘돌봄’이라는 속성이 무의식 속 뿌리깊게 자리를 잡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딸은 나와 같은 여자이기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딸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고, 아들은 나와 다른 남자이기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화 해버리는게 아닐까 한다.
아들은 먼 옛날 과거부터 남편과는 달리 자신의 든든한 아군이자 권력의 증명이고, 따라서 나의 위치를 공고히 해줄 확정된 자산이기에 아끼고 돌보게 되는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문화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거나 자산으로 여겨 아끼게 되는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아들들이 결혼해서 부인이 생기면 자신의 며느리를 딸에게 하듯, 아니면 딸보다 더 모질게 대하는게 아닐까? 이 경우는 정말 딸처럼 생각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종처럼 부리니 말이다.
딸이야 아들과 다르게 시집을 가버리면 그만이고, 남의 집 식구가 되어버리니까 아들만큼 투자를 하지 않던걸지도 모른다. 아들은 집안을 잇거나 집안에 남아 어머니의 완전한 아군이자 권력으로 자리매김 하지만 딸은 그렇지 못하니까. 모계사회가 아닌 부계사회가 주류인 인류 문명과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딸들은 아마 차별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이 아닌 과거에는 딸에게는 글조차 가르치지 않았으며 심지어 큰 딸은 살림밑천이라고 결혼하기 전엔 돈을 벌게 만들어 그 돈으로 아들을 키우고 교육하는데 쓰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딸을 자신의 신하 혹은 시녀, 하녀, 팀원, 비서같이 수단이자 수족으로 여기게 되어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거나 이것저것 자잘한 요구부터 시작해 버거운 요구까지 해대는게 아닐까?
물론 21세기에 들어서 여성인권이 개선되고 남자와 여자의 교육에 차별이 사라진 세상이 온 만큼 과거와 같은 수준의 차별을 받지는 않겠지만, 종종 들려오는 많은 딸들의 눈물 서린 사연 속에는 이게 21세기야 19세기야 싶은 수준의 여전히 심각한 차별과 그 속에 고통받았던 이들의 상처가 수두룩하다.
선사시대에는 수렵을 해오고 맹수와 다른 부족들에게서 가족과 무리를 지켜줄 남자의 힘이 절실했고, 농경시대로 건너왔을때는 노동력과 병력으로서의 남자의 힘이 필수불가결이였을 것이다. 문자가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이 방식으로 종을 이어온 우리 인간들의 DNA에는 분명 생존을 위한 남아선호가 박혀있을 것이고, 이 방식으로 우리는 21세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기에 이 방식이 악하다고 하고싶지는 않다. 험난한 시대였기에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상처를 받았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을 낳지 못하면 내쫓고, 아들을 낳을때까지 아이를 낳아야 했으며, 부족한 자원 속에서 아들을 우선적으로 챙겨야만 했을 것이기에 이해한다.
하지만 이제 팍스 아메리카나의 황금기가 찾아오고 21세기, 인류는 인류세 역사상 최고점에 와 있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며 신체적 차이가 있을 뿐 둘은 같은 종족이고 서로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 것을 상식으로 여기고 있는 시대가 왔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남자와 여자가 갈라져서 싸우는 세상마저 와버렸던 것이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것 없이 모두 섭리가 새겨준, 태초부터 빛나고 있는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우시아(Ousia / οὐσία), 로고스(Logos / λόγος)가 자리잡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서 하고싶은 말은 많다. 하지만 귀찮으니 예전에 써둔 글 중 ‘외로움의 무게(https://shearestis.tistory.com/109)’ 와 ‘초대장을 보낼 권한(https://shearestis.tistory.com/119)’ 그리고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https://shearestis.tistory.com/117)’ 라는 글을 참고하면 좋겠다.
외로움의 무게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무게를 견디며 고통을 겪고 외로움에 사무치며 살아간다.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선택을 하는 것
shearestis.tistory.com
초대장을 보낼 권한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아이를 잉태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것은 아이를 이 세상에 초대하는 것이다. 남녀는 부부가 되고, 부부는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다.이
shearestis.tistory.com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결혼은 타이밍이다’‘혼기에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있다’ 흔히들 어른들이나 기혼자들이 해주는 말이다.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고, 그것이 시기에 잘 맞물리면 결혼으로
shearestis.tistory.com
쉬운 자식인 딸과 어려운 자식인 아들.
21세기가 왔다고 해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사회적인 통념이나 사람들 머리 속 깊게 자리잡은 무의식이 한순간에 바뀔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엄마를 증오하거나 미워하고 싶지도 않다. 100년도 채 못 사는 미숙한 인간이기에 엄마도 몰라서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할 수도 있는게 아닐까 한다. 다만 저지른 잘못과 죄는 별개의 이야기이기에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고 있을 뿐.
깨물었을 때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고 한다. 다만 반지를 끼우는 손가락이 따로 있을 뿐이지.
그게 딸인 내가 아니라 아들이였을 뿐인 것이다.
그걸로 울고불고 할 필요도 없다. 비유는 비유일 뿐, 상처를 받았다고 주저앉아 아프다고 울고만 있어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것이였을 뿐이다 하고 내가 나 자신을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21세기,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황금기가 될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는 멸망을 앞두고 사랑을 직시할 마지막 권한을 선물받았을지도 모른다.
풍족하게 넘쳐흐르는 자원과 손가락 한번만 움직이면 필요한게 뭐든지 내 앞에 와주는 시대, 배움과 삶에 있어 남녀가 차별받지 않을 권리, 하루하루가 평온할거라 생각할 수 있는 안전한 세상 속에 사는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 자식을 두고 쉬운 자식과 어려운 자식으로 무의식적이게 구분지어 대하는 엄마들도 눈을 뜰 자유가 생긴 시대가 왔다고 생각한다.
내 자식의 배우자를 한사람의 인간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존중할 수 있는 시대가 드디어 찾아온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류 역사 최초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지 않고 자유로 인정받는 시대.
인류 역사 최초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죄나 흠이 아닌 선택으로 인정받는 시대.
그런 시대가 인류 역사 처음으로 허락된 것이다.
이 시대의 딸들은 남자가 싫은 남성혐오자라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찾아온 특권을 알차게 누리려는 체리피커(cherry picker)는 아닐 것이다. 단지 태어나서 살아보니 세상이 너무 아파서, 살아오면서 받았던 상처들이 너무 쓰라려서, 그래서 더이상 아프고 싶지 않았던게 아닐까? 그리고 이 세상에 자신들이 끌려와 패대기쳐진 것처럼 자신 또한 누군가를 이 세상에 끌어와 패대기치고 내가 겪었던 아픔과 받아야했던 상처를 또 안겨주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이 세상에 초대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초대장을 찢어버린게 아닐까?
일그러진 사랑 속에 자랐기에, 아니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스스로가 초대한 존재에게도 다시 이 폭력을 물려주는 것이 두려워 굳게 파티장 문을 걸어잠그고 누군가를 부르지 않고 여기서 이 아름답고도 추한 파티를 스스로 끝내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까?
'사유의 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0) | 2026.02.23 |
|---|---|
| 아이가 주는 행복 (0) | 2026.02.22 |
| 초대장을 보낼 권한 (0) | 2026.02.21 |
| 거인을 짓밟는 난쟁이 (0) | 2026.02.21 |
|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0) | 2026.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