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무게를 견디며 고통을 겪고 외로움에 사무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선택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부모의 삶 속에 사무치던 외로움은 아이를 낳아서 사라지는게 아니다.
부모의 등 위에 얹어져있던 외로움은 아이의 등 위로 옮겨가, 부모 대신 아이가 그 외로움을 짊어지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걸 두고 부모는 자신들을 짓누르던 외로움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외로움이 사라졌다고 착각하는거라 생각한다.
결핍에서 시작된 출산은 결국 이 세상에 누군가를 초대하는게 아니라, 나 대신 이 외로움을 짊어져달라고 문 밖에 손을 뻗어 누군가를 잡아 이 세상에 패대기치는게 아닐까?
자식은 부모의 등 위에 있던 외로움과, 삶 속에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외로움을 동시에 짊어지게 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는 그 무게에 짓눌려 부모의 기대에 보답하고자 노력하겠지만 분명 그 가슴 어딘가는 외로움의 무게로 인해 괴롭지 않을까?
그럼 부모가 만일 나이를 먹고 아이 곁을 떠난다면 그 외로움은 사라지는걸까?
아니다. 외로움은 사라질지 몰라도, 그 외로움이 있던 자리에 다시 ‘공허함’이 올라타 아이를 끝없이 짓누르게 된다.
결핍 속에서 사랑했기 때문에, 결핍 속에서 사랑을 받아버렸기 때문에 외로움은 공허함이 되어 끝없이 그 아이의 삶 속에 존재하게 되어버린다.
이 세상이 아름다워서 태어난게 기뻤다거나, 살아보니 좋았다고 생각하거나, 내 배우자와 꾸린 가정 속에서 느낀 사랑이 너무 충만하고 아름다워 이 사랑을 누군가를 초대해 나눠주고 싶다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 초대는 결핍이다. 결핍에서 온 초대는 초대가 아니라, 누군가를 이 세상에 끌어들이는 폰지사기가 아닐까? 내 삶이 너무 외로워서 널 불렀으니 날 대신해 나의 외로움을 들어주렴 하는 식의 외로움 돌려막기일지도 모른다.
이 끝없는 굴레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 단순한 의문조차 갖지 못하고 이것이 정답이라고 믿은 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한 이들의 손에 의해 끝없이.
누군가는 이 굴레를 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굴레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이 충만한 사랑을 ‘주고 싶어서’ 누군가를 초대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굴레 속에서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삶에 의문조차 품지 못한 채 본능에 이끌려 이 세상에 누군가를 패대기 치고있을지도 모른다.
슬프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고도 추하다.
세상은 이렇게나 눈이 시리도록 빛이 나면서 동시에 너무나 어둡다.
외로움의 무게: 고라니 목장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무게를 견디며 고통을 겪고 외로움에 사무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선택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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