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는 마치 양자역학과 닮아있다. 누군가 먼저 타자(他者)를 향해 관심을 보이고 관찰을 하며 그 삶을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정의한다면, 타자 역시 자신을 관찰한 이를 향해 관심을 보이고 관찰을 하며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타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그의 삶을 정의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상대방이 타자에게 그가 내린 정의를 들려주거나, 제3자에 의해 그 이야기가 닿았을 때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만.
물론 나는 과학자도 이과도 아니지만, 내가 이해한 양자역학의 원리에 따르면 인간관계 또한 양자역학의 핵심인 ‘관측에 의한 상태 붕괴’ 현상과 ‘상호작용’ 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정보는 파동으로서 존재하고 있다가 외부의 관찰에 따라 파동함수가 붕괴하고 입자로 고정이 된다는 원리, 그리고 당사자의 귀에 닿기까지의 고요한 상태는 지연된 선택(Delayed Choice)을 닮아있던 것이다. 이윽고 누군가와 타자의 관측과 그에 따른 정의가 서로에게 닿는다면 그것은 ‘양자 얽힘’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양자역학이라는 것을 두고 오직 과학이라는 학문만을 열쇠로 이해해보려 하기에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과학자가 아닌 내가 하는 말은 양자역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바보같은 발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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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생각을 좀 떠올리게 되었다. 별건 아니고, 자꾸 기혼 지인 하나가 미혼인 지인들을 향해 유독 날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미혼 중에서도 특히 미혼 남성에 한해서만 공격성을 보이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유순하고 성격이 수더분하여 그의 조롱(嘲弄)에 크게 반응하거나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이를 표적으로 삼아 심심할 때마다 샌드백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미있게도 그는 자신이 미혼 남성을 조롱하는 것은 곧 그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논리를 세워 자신의 부당하고 무례한 행동을 합리화 하였다. 다른 일기에서도 썼던 이야기이지만 그는 자신이 오직 미혼의 남성만을 샌드백으로 삼는 철칙을 고집하는 것에 대한 변명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자신은 여자이지만 ‘여미새’ 라고 주장하며 여자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은 여자를 너무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기에 여자를 공격하지 않는다며, 그 대신 남자를 공격하는 것을 당당하게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름의 논리라고 그는 자부했겠으나, 이것은 단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의 삶을 두고 오직 자신의 인생만을 데이터를 토대로 삼아 확증편향적인 참견을 해대는 것은 무례함을 넘어서 큰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고집하곤 하였던 것이다.
“○○씨는 결혼 안 해?”
“○○씨가 결혼 할 수 있게 내가 이렇게 쪼는거야.”
“내가 괴롭히는게 싫으면 얼른 ○○씨도 결혼해~. 그럼 내가 ○○씨의 아내 되는 사람을 생각해서 안 괴롭히지. 난 여자를 엄청 좋아하거든.”
내가 지켜보면서 들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몇 마디를 가져와봤다. 딱 3개만 가져왔음에도 기가 찬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저 속에 들어있는 악의(惡意)와 조롱이 느껴진다면, 직접 저 이야기를 듣는 당사자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 것인가.
그는 이전 나에게도 질문을 던진 적은 있다. 조롱이나 악의를 담았다기 보다는 아마 표면상으로는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 처럼 느껴지는 어투로 말이다. 그의 과거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분명 자신의 기혼 상태를 우월함 혹은 완성된 형태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니 아마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내게도 마운팅을 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시 나는 그에게서 적의(敵意)나 악의를 감지하지는 않았고, 이에 따라 나도 그에게 악의 한점 없이 나의 의견을 전달했던 기억이 난다. 몇번을 다시 쓰는게 귀찮아서 이전에 쓴 일기에서 긁어오자면, 대충 아래와 같이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 살아보니 세상은 살아볼만한 곳은 아니었다. 내가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기에 나는 이 세상에 누군가를 초대하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결혼과 부부생활을 선호하지 않는데, 나로 인해 누군가가 아이를 원하는 미래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 또한 원치 않기에 나는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기로 한 것 뿐이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질문한 것에 비해 조금 죽은 눈빛과 말꼬리를 “아…” 하고 흐리며 답변을 들었고, 나는 그의 딩크(Dink) 결정을 응원해줬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자신이 집안 대대로 몸이 약했는데, 그로 인해 자신도 몸이 약해서 고생스럽다며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이라 했던 것이다. 현명한 발상이다. 스스로의 인생 속에 겪은 고통을 다른 존재에게 떠넘기지 않는 결정이니까. 그럼에도 그는 결국 늦은 나이에 뒤늦게 부랴부랴 아이를 낳았고, 그날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나를 좀 어이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발언은 과연 거짓이였을까, 아니면 그 당시만 하여도 진심이였으나 변해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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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나는 원래 그들의 기혼으로서의 삶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이 어떤 경위로 만났고 어떤 프로포즈를 받았으며 어떤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매번 들려주곤 하였으나, 아쉽게도 나의 부러움을 사지는 못했기에 나는 그저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마음으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겸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기에 딱히 귀찮다 생각한 적도 없고. 어쩌면 지인은 이야기를 듣는 나의 태도를 그들 삶에 대해 부러움을 가졌다 생각했다고 오해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내가 들려준 결혼과 출산에 대한 결정을 듣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는 제3자인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미혼 남성을 향해 악의 섞인 발언을 던져 그를 대화의 소재로서 도마 위에 올려 칼을 들어올리는 것을 즐겼고,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순한 상대방의 배려를 두고 자신이 강자, 상대가 약자의 포지션에 있다고 이해한 듯 하였다. 그에 대한 괴롭힘은 가끔 도가 지나쳤다 생각될 만큼 악의가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기하게도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였기에, 자신이 강자 포지션을 점유할 수 없는 상대방은 기가 막히게 피해가곤 하였다. 찔러봤을 때 자신이 원하는 약자로서의 반응이 오지 않거나 자신이 패배하는 구도가 만들어질 것 같으면 정말 감탄스럽게도 미꾸라지처럼 쏙쏙 그 상황을 모면하였던 것이다.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공격은 위험성이 높다 판단했는지 자기 스스로를 ‘여미새’ 프레임에 가둬 여자들의 동조와 연대를 쌓아올렸고, 남자 중에 기혼 남성은 공격대상에서 배제했다. 그리고 미혼 남성들 중에서도 자신의 공격에 대해 견고히 방어하는데 어려움이 없거나 오히려 역공을 해오는 이는 찔러본 뒤 빠르게 후퇴했던 것이다. 다양한 논리가 있었는데 듣고있으면 궤변의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곤 하였다. 스스로도 그의 궤변의 모순을 충분히 알 수 있을텐데, 몰라서 저러는건지 아니면 알고도 무시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쪽이던 그것을 장점이라고 여겨줄 순 없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의 ‘찔러보기’의 대상이 되었던 한명으로서 그가 나를 관측하고 정의함과 동시에 나 역시 그를 관측하고 정의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를 찔러본 것은 1회에 그쳤으나, 내가 지켜보는 곳에서 지인 자신이 약자이자 먹잇감으로 지정한 이를 계속해서 찌르는 것을 내가 목격하고 있으니 나의 관측과 정의 역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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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쩌면 자신의 삶과 타인(他人)의 삶을 저울에 놓고 르상티망(Ressentiment)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전에 써놨던 글을 갖고와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하고싶은 이야기를 전부 써내려간다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이고, 그만큼 나의 그림그릴 시간과 게임 할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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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은 자신의 삶을 전시하기를 즐기는 듯 하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삶을 전시하고, 자신이 정의하기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未完)의 상태에 놓여있는 미혼들을 향해 티배깅을 하듯 뽐내는 것을 꽤나 즐기는 듯 하였다. 흥미롭게도 그것에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고 ‘재미있게 잘 사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나는 공격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가지 않을 길에 대한 데이터를 알아서 요청하지 않아도 쑥쑥 뽑아내주는 지인은 나의 흥미로운 관찰대상이 되어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일기 소재를 성실하게 제공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 쓰고 싶어도 그는 정말 흥미롭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하지 않을 선택, 스스로의 말과 모순되는 언행,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삶의 태도 등이 그러하다.
미혼 남성에 대한 티배깅을 수시로 이어가는 그는 어쩌면 자신이 선택한 삶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전시하는 삶의 단편 속에서는 무척이나 행복하게 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인생 전시와 툭툭 내뱉는 타자에 대한 무례한 공격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의 언행은 ‘결핍’에서 오는 것만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어쩌면 시대에 떠밀리듯 결혼을 결정한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는 듯 하였다. 여자고 남자고를 떠나서 행복하게 사는 이가 ‘퐁퐁남’ 이라는 멸칭을 입에 올리며 자기는 자신의 남편을 퐁퐁남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애초에 사랑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이유가 없을텐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종종 그의 남편을 ‘퐁퐁남’으로 만드는 일화를 자각도 없이 전시했고, 아마 그는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수도 없이 그 일화를 들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나의 덤덤한 태도에 그는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 남편 퐁퐁남으로 만들면 안되는데…”
이 말 속에는 그의 남편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들의 결혼을 이어붙이기 위한 어떠한 강박이나, 세간에서 흔히 다뤄지는 남녀갈등과 갈라치기 세태를 이용해 자신의 삶을 올려치기 하려는 어떠한 의도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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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은 뒤에는 한술 더 떠, 자신의 아이를 마치 ‘수단’처럼 대하는 모습을 수시로 노출하곤 했다. 어쩌면 본인은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증거이지만 말이다. 미혼 남성 지인에 대한 공격에 아이는 또다른 공격대상으로서 사용되기도 했다.
“얼른 결혼해서 아기 낳아 우리 ○○이 친구 만들어줘야지~!”
진정으로 자신의 결혼생활이 행복해 자신의 주변에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길 권하고 있는 것이라면 조롱 섞인 자랑을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결혼 생활에 대해 장단점을 진지하게 알려주거나, 상대방에게 좋은 이성을 소개해주려는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수년간 지켜본 결과, 단 한번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결혼 생활의 단편 속 즐거운 이벤트만을 전시해댔고, 그에 따른 주변의 감탄과 찬사를 바랬다. 누군가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면 신이 나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사진을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나는 그가 타인의 반응을 먹이로 삼는 반사체(反射體)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다.
나의 지인은 어쩌면, 스스로의 삶이라는 르상티망이 만든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주변을 지나가는 이들의 발목을 잡고 그의 삶으로 끌어들여 같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뒹굴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때가 종종 있다. 진심으로 자신의 삶에 후회 한점 없고 행복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언행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사실은 행복이 아니라 후회 속을 헤메며 안개 낀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딱한 일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는 대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뒤 타인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내 주관적인 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이 진심으로 행복할지도 모르니까.
그는 그렇다면 미혼인 자가 자신의 삶을 부러워하길 바랄지언정, 그가 결혼해서 좋은 이성과 가정을 이루고 자기보다 행복한 삶을 보여주는 것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미혼 남성 지인에게 던지는 연애와 결혼 독촉은, 심사숙고 끝에 좋은 상대를 만나 자기보다 행복하고 완벽한 결혼생활을 하지 말고 조급함 속에 아무 매물이나 적당히 타협해 하향지원해 골라서 너도 나처럼 불행과 후회 속에 방황하며 내 선택을 합리화하는 삶을 내게 전시해달라는 절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과시하며 자랑스럽게 꺼내놓는 삶의 전시물들은 이상하게도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행복하게 여겨지는 것을 굳이 남에게 전시해서 특별한 것처럼 보여주고 박수를 요구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시를 들어서 설명을 해보자면, 온라인 대전 게임 내의 티배깅(Teabagging) 행위를 들 수 있다. 예를들어, 게임에서 수없이 많이 적을 잡아 킬(kill)을 따냈다고 치자. 그리고 몇번이고 나에게 데스(Death)를 당한 상대방이 악에 받쳐 몇번의 시도 끝에 나를 킬 하는데 성공했던 적이 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티배깅을 했고, 나는 리스폰을 기다리며 그 장면을 지켜본 적이 있다. 별로 화가 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실력 끝에 우연히 나를 잡는데 성공했고, 그동안의 분함을 표출하며 기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티배깅을 하기 위해 그는 손가락 연골을 희생하고 있었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겐 내구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는 티배깅이라는 아무 쓸모도 없는 행위에 연골 내구도를 깎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매칭 때 그와 우연히 같은 편이 되었고, 나는 그의 악의 섞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적극적으로 서포트를 넣고 그가 킬을 따내거나 나를 도와준 순간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점점 착해지는 것 같았고, 몇번의 매칭 끝에 그는 나에게 킬을 당해도 티배깅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에게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모션을 취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지구 어딘가의 누군가가 먼저 내게 악의를 품고 그 악의를 표출했으나, 내가 그 악의에 반응하지 않고 호의로 답하였기에 그가 품은 악의가 호의로 변한 순간을 관측할 수 있었다. 내가 선한 존재라서 호의로 답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즉 상대방 역시 완벽한 악인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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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마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자신이 타인을 관측하고 정의하고 있는 동안, 타인 역시 자신을 관측하고 정의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제3자인 나만 하여도 그럴진대, 그의 공격대상이 되는 이가 그러지 않을것이라는 법은 없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오직 한쪽만의 일방적인 간섭으로는 절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언행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뤄졌으며, 그에 따라 많은 이들이 그를 관측하고 정의하고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괜히 입을 다물고 귀는 열어두라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관측당하는 삶을 원하는 이도 분명히 있을 것이나,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인이 자신의 삶을 정의해주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자신이 원하는 정의도 있을 것이나, 그 속을 들여보고 결핍을 눈치챈 뒤 결코 원치 않는 정의를 내리는 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항상 원하는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이치가 여기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결핍된 이들은 빈 수레가 요란하듯 자신의 삶을 마치 특별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만 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에 집착하고, 그 포장지로 감싼 삶을 전시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집에서 식사를 하며 끼니를 때운 것은 남에게 일부러 말하지도 않지만, 비싼 5성 호텔의 디너 뷔페에서 고가의 식사를 즐기고 온 것은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던가? 자랑이던, 그곳에 갔던 경험을 공유하며 다른 이도 그곳에 가서 즐거움을 누리길 바라던 말이다.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 또한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종종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중에 좋은 사람 없는데 결혼하고 싶어지면 어떻게할래?”
“늙어서 고독사 하면 어쩔래?”
다른 글에서도 한 말이지만,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원래 후회하며 살기 마련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상상할 수 있는 지성이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탑은 수없이 많은 벽돌로 쌓아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탑을 쌓는데 사용하는 벽돌이 만약 책이라면, 벽돌을 만드는데 사용된 흙은 과거의 누군가가 남긴 기억, 지식, 지혜일 것이다. 굳이 직접 가보지 않고도 충분히 삶의 갈림길에서 나눠져있는 길들에 대해 알 방법은 많다.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이라는 하나의 데이터만을 놓고 하는 말은 확증편향을 일으킬 수 있어, 그 이야기만 듣고 인생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지금은 옛날과 달리 정보를 원하기만 한다면 어디서든 손가락 한번 움직여서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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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지인 이야기를 계속 언급하여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나는 이 지인을 싫어한 적이 없다. 오히려 흥미롭다 생각하고 호감을 품고 있는 것에 가깝다. 오히려 보고있으면 즐겁기도 하고 말이다.
그저 이 지인이 수시로 자신의 삶을 전시하고 타인을 관측하며 정의내리고 깎아내리는 과정을 계속 옆에서 관찰하다보니 그의 삶을 나 또한 본의 아니게 그를 관측하고 정의하게 되면서 양자역학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이렇게 말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너를 들여다본다.”
인간관계 역시 어쩌면 양자역학과 더불어 심연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내가 타인을 향해 호의를 품고 대한다면 그 역시 호의를 갖고 나를 평가할 것이나, 악의를 품고 대한다면 그 역시 악의로서 답해올 것이다. 물론 호의가 무조건 악의로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것은 열역학 법칙에 나오는 엔트로피(Entropy) 개념을 두고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다. 질서(秩序, Order)와 절제(節制, Temperance) 그리고 자유(自由, Liberty)는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혼돈(混沌, Chaos)과 붕괴(崩壞, Collapse) 그리고 방종(放縱, Abandon)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을 쌓아올리는 것은 수없이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어렵지만, 문명이 붕괴하는 것은 노력 없이 정말 한순간이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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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지인에게 악의를 품지 않았다. 그러나 지인은 타인을 대함에 있어 서열을 가리고, 강자와 약자로 판단해 약자로 정의한 이를 공격하며 악의를 발산하는 삶을 살고있다. 그에 따라 그는 자신이 발산한 악의로 인해 타자인 나에게 그가 그토록 원한 선하고 긍정적인 정의를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타인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를 갖고 호구가 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건 언제나 자기 자신이여야 하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위에서 수없이 말한 나의 지인처럼 나르시시스트적인 악의를 갖고 타인을 수단으로서 대하며 자신의 삶을 정의받기 위한 반사체로 사용한다면, 그 역시 반사체로서의 삶 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모든 이의 삶 속에는 관측과 정의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정보값이 있다. 그 정보는 단지 하나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정보들의 중첩으로 이뤄져있다. 사람이란 본디 매우 복잡한 존재이므로. 그리고 그것을 바깥으로 자신이 꺼내놓고 타인의 관측과 정의를 받는 것에 따라 단지 양자역학적인 양자 얽힘으로 발현되는 것 뿐이다. 이미 그 삶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관찰과 정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으며 스스로가 이미 결정한 값을 갖고 있는 상태 역시 중첩된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빛이 나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빛에 타인이 이끌려 칭찬과 감탄을 보내기를 바란다. 당연한 것이다. 그 본능이 우리 인간을 여기까지 데려온 원동력 중 하나이므로.
단지 그 빛을 바란다고 타인을 끌어내리고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는 절대 빛이 될 수 없을것이다. 오히려 그는 에너지의 급이 다른 자신만을 인식하고 그 속에 계속해 더 높은 급을 차지하기 위해 발악하며 날아오르려 할 것이나, 그것은 비상(飛上)이 아닌 추락(墜落)을 향해 날갯짓을 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스스로 빛을 품으려 노력하고, 자신의 빛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빛나도록 두는 것이야말로 진정 타인에게 관측을 통해 긍정적인 정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미 빛이 나는 자는 자신에게 빛이 있다고 굳이 외치지 않더라도 그 빛에 이끌려 사람들이 시선을 돌릴테니 말이다. 없는 빛을 있는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거울을 두고 여기에 빛이 있다 주장한들 끝없이 외부에서 빛을 훔쳐오지 않는 한 언젠가는 거울에는 빛이 반짝일 수 없을테니까. 훔쳐온 것, 남의 것을 탐한 것, 빼앗은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인간관계와 양자역학: 고라니 목장
인간관계는 마치 양자역학과 닮아있다. 누군가 먼저 타자(他者)를 향해 관심을 보이고 관찰을 하며 그 삶을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정의한다면, 타자 역시 자신을 관찰한 이를 향해 관심을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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