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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베드로의 천국, 막달레나의 낙원

아브라함 계통 종교, 그 중에서도 한국에선 유독 개신교는 항상 타인에게 숨쉬듯이 무례하다.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 무리를 발견했다. 보통 전단지 아르바이트는 빠르게 전단지를 나눠주면 그만큼 일이 빨리 끝난다고 들었기에, 그들의 빠른 퇴근을 응원하고자 언제나 그렇듯 전단지를 받아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렸던 것 같다.
 
그런데 들려오는 거지 발싸개같은 한 마디에 모든 기분이 잡쳤던 것이다.
 
“예수님 믿으세요~.”
 
짜증나게 이놈의 예수쟁이들이 또 아까운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를 불쏘시개로 만들어 환경을 낭비하고 다른 사람의 귀한 시간을 낭비시키려고 길에 서서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평소같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을, 억지로 그걸 들려주려는 아줌마를 보니 짜증이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 아주머니에게 “안 믿어요.” 라고 일갈하고 길을 지나갔고, 뒤에서 그 아줌마가 웃기게도 이렇게 말하였다.
 
“안 믿으면 천국 못 가는데.”
 
와 정말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그들의 모순과 궤변을 통해 설명하자면, 예수(Jesus)라는 자는 천국의 입장 자격을 신자(信者)와 불신자(不信者)로만 구분하는 졸렬한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개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채, 그저 자신을 믿는 자만을 천국에 들이겠다고 결정한 편협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들 스스로가 그들이 믿는 신인 예수를 아주 제대로 엿먹이고 모욕한 것이다. 그의 온 세상에 대한 박애(博愛)를 그들 스스로가 진창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 내게조차 그것은 너무나 모욕적이게 들려왔다.
 
“댁이나 가세요.” 하고 짜증이 나서 일갈해버렸다. 연장자에게 할 법한 대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싸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향해 천국에 못 갈 것이라며 그들의 세계관 속 최악의 저주를 그대로 타인에게 내뱉었으니 나 역시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먼저 선빵을 친건 그쪽이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말은 더욱 웃겼다. 녹음해서 온 세상에 들려줄걸, 내가 유튜버가 아니라 카메라를 항상 켜고 다니지 않는게 아쉬울 정도였다.
 
“네 저는 당연히 갈거지만요~.”
 
그저 믿기만 하면 갈 수 있는 천국 따위, 무슨 가치가 있다는건지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선택받았다 착각하며 선민의식에 젖어있었다. 저런게 바로 광신도라는 것이지. 그의 논리대로면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던 시대의 비기독교권 국가 속 많은 위인들은 전부 다 지옥에 가 있어야한다. 그가 어떤 업적을 세우고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희생했던 관계 없이, 그저 믿지 않은 불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지옥에 갖다 쳐넣어버린 야훼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럼 니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어 만백성을 가엾이 여겨 글을 읽을 수 있게 한 위대하신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선 불신자라 지옥에 떨어졌다는 말을 하고 싶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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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이야기들을 하기 전에 다음 문서들을 참고로 두고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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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탐구 메모

트리니티 시스템 (The Trinity System: Providence)이건 어릴적부터 내가 감으로 느껴오던 것을 2025년 12월 4째주 일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누워있다가 할 일이 없어서 대충 끄적여 언어화한 낙서임.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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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동제자부터 신에게 버려진 무당까지 https://shearestis.tistory.com/115

애동제자부터 신에게 버려진 무당까지

애동제자 라는 단어를 주워들었다.신내림을 받은 직후부터 약 3년에서 5년까지의 뉴비(Newbi) 무당을 이렇게 지칭한다고 한다.. 어떤 생각으로 인간에게 신이라는 존재가 다가와서 자신을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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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해킹, 빙의와 강령 https://shearestis.tistory.com/110

영혼의 해킹, 빙의와 강령

21세기 현대 과학으로도 설명되기 어려운 현상인 빙의와 강령, 강신 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무속행위 한국의 무속 신앙 속 ‘굿’을 비롯해 고대 그리스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들이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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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의식과 사념, 그리고 주술 https://shearestis.tistory.com/116

집단의식과 사념, 그리고 주술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명의 근원이자 벽사(辟邪), 퇴마(退魔)의 속성을 지닌다. 흔히 재수가 없다며 ‘소금 뿌려라’ 라고 하는 표현이나, 상갓집에 다녀온 이에게 소금을 뿌려주거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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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의 무게 https://shearestis.tistory.com/109

외로움의 무게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무게를 견디며 고통을 겪고 외로움에 사무치며 살아간다.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선택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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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장을 보낼 권한 https://shearestis.tistory.com/119

초대장을 보낼 권한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아이를 잉태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것은 아이를 이 세상에 초대하는 것이다. 남녀는 부부가 되고, 부부는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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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주는 행복 https://shearestis.tistory.com/121

아이가 주는 행복

흔히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있어.’ 어떻게 들으면 참 예쁜 말이라고 들릴 수도 있다.하지만 내 귀엔 도저히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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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선교사들이 원주민에게 성경을 건네며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포교를 했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원주민은 “몰라서 믿지 않은 이는 그럼 무조건 지옥에 가는 것이오?” 라고 물었고, 선교사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다. 그러자 원주민은 아주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럼 대체 그 이야기를 내게 왜 한 거요?” 라고 답변한 일화가 있다. 선교사는 무지(無知) 속에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원주민을 향해 기독교를 전함으로서 그가 지옥에 떨어지게 만들 함정을 설치해버린 것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들 스스로도 자기들의 논리가 서로 충돌하는 마당에 무슨 포교를 하겠다는건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기독교를 믿으라면 차라리 카톨릭(Catholic)으로 가겠다. 개신교와는 다르게 카톨릭은 교황청이라는 총본산이 있으며, 자영업자처럼 누구나 원하면 교회를 개업할 수 있는 개신교와는 다르게 질서와 절제 속에서 엄격히 사제를 배출하고 그 사제들도 신을 모시는 몸으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기에 굳이 믿어야 한다면 성당으로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카톨릭은 주먹구구로 운영되는 그들만의 리그와 다르게 중앙에서 정해진 프로토콜이 있고, 그에 따라 사제와 신자 모두가 교육을 받고 다양한 규범이나 예법 속에 질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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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스쿨(Mission School)을 졸업한 나로서는 개신교에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기가 어렵다. 그들이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고자 하는 바는 분명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나, 추첨을 통해 들어간 학교에서 방과 후 억지로 사람들에게 예배를 보게 하거나 기독교적인 것을 강요받는 것이 기분 좋았을 리가 없다. 
 
또한 대학에서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기독교 수업이나 채플 시간의 경험 역시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키기만 했다. 채플 수업은 갑자기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며 그것을 따라 부르라고 조교들이 어슬렁 대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따라서 부르는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부라리며 입을 다물고 있는 학생을 향해 위협을 가하는 조교들은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니까 채플 책(내가 산 내 책임, 공용 책이 아님) 귀퉁이에 낙서를 하고있는 내 뒤통수를 퍽 치고 지나간 조교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진심 “왜 때려 씨발아!” 그 자체였던 사건이다. 착하고 유순한 그 당시의 나는 그저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며 풀이 죽어 있었지만 말이다.
 
또한 기독교 강의 시간에 목사라는 놈이 내뱉은 망언 역시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첫째보다 둘째가 더 나은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부모님이 첫째를 만들때보다 둘째를 만들 때 경험이 풍부해서 둘째의 완성도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어떤 의도를 갖고 말했던간에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엔 유쾌하지 않았다. 일단 성적인 희롱이 느껴졌고, 세상의 모든 뛰어난 첫째들을 폄하하는 것이 종교의 지도자가 할 법한 말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이전의 다른 목사님이 강의하던 수업 중 내가 과제로 제출한 ‘기독교 수업을 듣고 가진 궁금한 점’에 대해 자신의 연구실로 불러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던 그가 참된 기독교인이자 목사라고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개신교인들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 난 ‘개신교’를 믿을 바에야 차라리 카톨릭으로 가고 말겠다고 마음을 굳혀버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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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웃집 가족을 좀 떠올렸다. 그 가족은 골수 개신교도고 서울에서도 상당히 세가 크고 돈이 많은 부자 교회를 다니던 것으로 알고있다. 그들은 저마다 약속이라도 했는지 우리 가족을 향해 각자 하나씩 마킹을 하고 포교를 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과 이유로 포교되지 않았고, 그들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집 아주머니는 마지막으로 식사라도 함께 하자고 권했으나 엄마는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다. 교회에 같이 가자는 것이였다. 거절을 잘 못 하는 우리 엄마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나, 동시에 친하게 지내던 좋은 이웃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엄마를 대신해 철면피인 내가 나섰다.
 
어차피 아줌마랑 교회 한번 갔다가 맛있는거 먹고 오면 그만인 이야기 아닌가? 뭐가 어렵겠느냐 하는 생각에 “내가 대신 갔다오지 뭐.” 하고 말을 했고, 당연히 등짝을 쳐맞을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엄마는 “그렇게 해줄래?” 라며 허락을 내려줬던 것이다. 등짝에 힘 꽉 주고 있었는데 좀 김이 새긴 했다.
 
아줌마를 따라간 교회는 진짜 상상을 초월했다. 1층의 서점과 세련된 카페 그리고 높은 천장의 로비는 꼭 호텔의 로비를 연상시켰다. 지하에는 갤러리가 있었는데, 각종 미술품을 전시해 두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지하, 시에서 허락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파고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중인지라 시에서는 당장 이 지하를 메우라고 시정명령을 내렸다나 뭐라나?
 
건물은 마치 백화점 같았다. 백화점에서나 볼 법한 높은 엘리베이터와 쾌적하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건물 인테리어 하며, 당장 세를 준다면 고급 쇼핑몰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의 교회라니.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런 건물을 그냥 교회로만 활용할 수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여기에 주말만 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말이겠지? 그러니 이렇게 백화점처럼 크고 훌륭한 건물을 지었을 것이다.
 
예배당은 꼭 대학교 대강의실 같았다. 영화관에서 볼 법한 계단형 좌석 앞에는 무대가 있었고, 그곳에 대머리 목사가 올라 연설을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은데 하나 유독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저는 불교도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들은 기독교도가 되기 위한 세팅이 이미 마쳐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불교도들을 미완성인 상태로 폄하하는 모욕적인 말을 목사라는 사람이 내뱉은 것이다. 당장 대머리를 목탁 대신 두드리며 불교도들에게 사죄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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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자꾸 조명에 그 목사의 대머리가 반짝이는걸 보느라 다 까먹고 저것 하나만 남았던 것 같다.
 
연설이 끝나고 종이를 뒤로 돌리기에 받았더니 그 종이에는 ‘새 신자 등록’ 이라는 단어가 써져있었다. 아, 아줌마가 데려온 이 예배는 그냥 예배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된 함정이였던 것이다. 엄마라면 반드시 거절하기 어려워서 여기에 신상정보를 써서 제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줌마는 하나 간과한 점이 있다. 이미 아줌마를 따라온 것은 우리 엄마가 아닌 나였고, 나는 나만의 절대적인 세계관과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는 고집쟁이인 것이다.
 
목사는 대머리였다. 야훼와 예수를 모시는 가장 가까운 이가 대머리인 것이다. 자신을 모시는데 일생을 바친(바친것도 아니긴 하다) 이를 대머리가 되도록 방치하다니, 그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속에 나오는 데미우르고스(Demiurge, Δημιουργός)와 같이 무력한 존재이거나, 악한 존재일 수 있다. 마르키온(Marcionism) 파에 나오는 존재와 같을 수도 있고. 그러니 대머리가 되도록 목사를 방치한 것이겠지! 어느 쪽이던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판단이 제대로 서버렸고, 나는 새신자 등록 카드를 제출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무대에 서서 카드를 받던 목사는 끝까지 입을 삐죽이며 “아직 n명이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연신 귀여운 척 뿌앵을 하고 있었으나, 당장 대머리가 자라는 권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나도 이 카드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서 제출할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그가 엑소시즘(Exorcism) 쇼라도 보여줬다면 모를까, 그는 자신과 자신이 모시는 신의 권능을 한 조각도 증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고로 아줌마는 무엇때문에 새신자 등록을 거절했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목사가 대머리라서 믿음이 가지 않았다고 간단히 답변하고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은 기억이 난다. 아줌마 미안… 그래도 어디서든 잘 사실거라 믿어요. 참고로 아줌마가 이별의 선물로 주고 간 성경은 잘 보관해 뒀다가 대학교 강의에 필요하다는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우리집에 있는것보다 누군가가 써주는 것이 훨씬 더 환경에도 도움이 되겠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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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의 테두리에 들어오지 않은 이들을 향해 모욕과 저주를 퍼붓는것에 한점 부끄러움과 의심을 갖지 못한다. 심지어는 자기들끼리도 다른 교회에 다니는 개신교인을 악마라고 부르거나, 그곳을 악마의 교회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카톨릭은 다니는 성당이 아니라 다른 곳의 교구에 미사를 가더라도 그것을 죄악시 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들은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 연인이라 할 지라도 개신교를 믿지 않는 이를 죄인이라고 단정짓고 그들이 반드시 자신들이 정의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믿는다. 그와 동시에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에 한 순간도 주저함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추잡한 언행을 타인에게 하는 것을 ‘포교’라고 정의하고, 그 무례함이 타인을 향한 진정한 구원의 시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맹신자, 광신도의 모습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광기만이 보였다.
 
사막신 야훼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지구의 유일한 신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함과 동시에, 자신은 질투하는 신이니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가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동시에 다른 신의 존재를 언급하였고, 그를 섬기지 말라고 견제까지 했던 것이다. 다른 신이 자신의 하위 신이나 피조물이라면 그들을 섬기는 것 역시 결국은 자신을 향한 숭배에 다다를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는 사실 영지주의 속 데미우르고스처럼 세계의 찬탈자에 지나지 않았기에 다른 신들에게 갈 파이를 자신이 독식하고 싶었던건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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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힘(Elohim, אֱלֹהִים). 신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복수형이다. 신의 권능을 표현하기 위해 신 이라는 단어인 엘로아(Eloah)를 복수형으로 사용하는 것이라 들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만 이해하기에는 내가 너무 의심이 많은 것인지 하나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야훼의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천사들이 있다. 또한 악마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과거 신으로 숭배받던 존재가 포함되어 있다. 그들 중 천사로 삼은 이들은 사실 모두 그리스 로마의 신들처럼 다신교 속 수많은 신들이였고, 세력다툼 속에 신성을 빼앗기고 일개 천사로 강등당한 것이라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사실 모든 신들을 아우르는 단어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세상의 창조자가 아닌 그저 찬탈자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영지주의와 마르키온 파 이야기에서도 옅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지주의의 논리를 따르면 그는 불완전하여 자신이 세상을 만든 주인이라 착각하고 있는 존재이거나, 스스로가 찬탈자임을 알면서도 세상을 속이고 있는 악한 존재가 된다. 마르키온 파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사랑의 신으로서 내려온 예수의 권능을 탐하여 그를 납치해 아들이라 속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느쪽이던 선(善)과는 멀어보인다.
 
그는 전지전능한 존재임에도 아담과 이브가 사는 낙원 한복판에 먹기 좋게 탐스러운 선악과를 심어두고, 뱀도 낙원에 살게 하였다. 전지전능한 그라면 그들이 뱀의 유혹에 의해 선악과를 먹을 것을 알았을텐데도 그는 인간들이 선악과 하나 그걸 먹었다고 야멸차게 맨몸으로 낙원에서 그들을 쫓아내 각종 형벌을 짊어진 삶을 선고하였다. 사랑하는 피조물들을 향해 사랑의 신이 택할 법한 선택지는 전혀 아닌 것이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실망해서 쫓아낸 것이면 그는 불완전한 신이고, 이 모든 일을 예상했음에도 쫓아낸 것이라면 그는 악한 존재인 것이다.
 
라헬(Rachel)과 야곱(Jacob)의 사랑 이야기 또한 그렇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라헬은 야곱을 사랑했다. 그럼에도 그는 단지 자신을 모실 백성을 낳기 위한 수단으로 야곱을 선택했고, 야곱이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 그의 언니에게 이스라엘의 백성을 낳게 만들겠다며 둘이 맺어지지 못하는 운명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야곱은 라헬을 변함없이 사랑하였고, 그 사랑을 전지전능한 신이 찢어놓지 못한 것이다.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해서 레아를 사랑하게 하지 못한건지, 그렇게 하지 않은건지 모르겠지만 어느쪽이던 그는 전능하지 않거나 인간의 사랑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레아의 자식들은 야곱과 라헬의 사랑에서 태어난 요셉(Joseph)을 질투하였고, 그를 시기해 아버지 몰래 노예로 팔아버렸다. 당연히 라헬과의 사랑 속에 태어난 결실을 잃은 야곱은 불처럼 분노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요셉은 잘 풀려서 권력과 명예 속에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Benjamin)에게 돌아올 수 있었지만. 야곱은 죽어서 비록 그토록 사랑하고 원하던 라헬이 아닌, 레아의 옆 가족묘에 묻혔지만 나는 다르게 해석한다. 몸은 그곳에 뒀을지라도 야곱은 자신을 기다려주던 사랑하는 연인 라헬의 손을 잡고 사이좋게 섭리의 기둥을 향해 떠나갔다. 둘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로를 그리워했고, 아마도 둘 사이에는 끼어들 틈 하나 없이 사랑만 가득한 채 또다른 여행을 떠났을거라 믿는다. 그들이 향한 곳은 달콤하기만 한 천국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는 낙원일 것이다. 그 낙원이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라헬과 야곱, 두 사람이 함께라면 분명 좌절하고 꺾이는 삶 속에서도 분명 사랑을 통해 낙원을 쌓아올릴 수 있을테니까.
그런 둘을 갈라놓은 존재가 과연 선한지, 인간을 위하는 존재일까? 진정 사랑하는 피조물들이 원했다면 그의 원대한 계획과 뜻이 무엇이던 존중하고 계획을 수정해줬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는 결국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신의 아들이라며 지상에 내려보낸 예수의 이야기도 그렇다.
과거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기원전의 시대, 약혼자도 있는 여자의 혼전임신은 돌로 쳐죽여도 할 말이 없는 큰 흠이였다. 전지전능해서 모든것을 아는 존재임에도 야훼는 예수를 미혼인 마리아에게 잉태되게 하였다. 수태고지라고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 통보를 하였다고 하지만, 그건 사후통보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마리아의 약혼자인 나자렛의 요셉(Joseph of Nazareth)이 좋은 사람이였는지 무사히 넘어갔을 뿐이지, 자칫 잘못하면 마리아는 목숨을 잃었을 대 사건이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는 예언을 통해 예수의 탄생과 그가 앞으로 행할 일들을 세상에 널리 퍼뜨렸고,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이집트의 폭군은 모든 태어난 장자(長子)들을 잡아 잔인하게 죽이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서 마리아와 요셉은 무사히 도망을 나와 헛간에서 동방박사들의 축복 속에 아기예수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흘러버린 수없이 많은 다른 집 첫째 아들들의 목숨은 이미 주워담을 수 없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전지전능한 존재는 그 많은 갓 태어난 아이들의 삶을 그저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려보낸 예수를 위해 모른 척 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내려보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두었다. 그 역시 태어나 살아가며 고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이였음에도, 무서운 형틀에 잔인하게 생살이 뚫려야 하는 시련 속에 그를 방치한 것이 과연 선한 선택이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 순간 얼마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속으로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을지 원망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좀더 온건한 다른 방법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전지전능하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십자가에 못이 박혀 고통 속에 천천히 죽어가야 했고, 나중에 부활하였다 하지만 그의 몸에 남은 상처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고통스러웠던 시간과 통증 역시 되돌리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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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재미있게도 개신교의 포교방식은 마치 다단계 혹은 폰지사기(Ponzi Scheme)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기존의 신도가 누군가에게 전도를 해서 포교에 성공하면, 포교에 성공한 신도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이제 포교당한 새로운 뉴비는 또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논리에 빠져버리게 된다. 그에 따라 나 대신 지옥에 가줄 다음 사람을 찾아 허겁지겁 전도에 나서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물귀신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오컬트적인 지식에 따르자면, 물귀신은 죽은 자리에 그대로 묶여있다. 일종의 수중 지박령 같은 상태인데, 자력으로는 죽은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대신해 그 자리에 묶여있을 희생자를 찾아야 하므로 누군가를 발견하면 이미 죽었음에도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낼 각오로 피해자를 죽게 만들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하고 자신은 승천하려 하는 것이다. 개신교의 전도와 포교를 이것에 치환한대도 위화감이 전혀 생기지 않을 만큼 둘의 모습은 닮아있다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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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중에도 개신교도가 둘 있다. 둘다 그냥 인간으로 보면 좋게 말해서는 착하고 솔직하게 말해서는 자기 생각이나 줏대라는게 없고 그저 순종적이고 순하기만 하다.
 
이 둘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둘에게는 놀라우리만치 똑같은 공통점이 있다.
 
선민의식
 
겉으로는 친구들에게 사근사근하고 싫은 소리를 잘 못 하면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다른 친구들을 두고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못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의무교육을 받아놓고도 천국에 대한 의심조차 품지 못한다는게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트루먼 쇼라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교감을 하고 추억을 만들면서도, 친구들이 가진 선한 면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그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나가서 읽는 책과 귀에 들려오는 세뇌 속에서 불신자들은 뭘 하던 어떤 삶을 살던 예수를 믿지 않은 죄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에 한 점 의심조차 품지 못하고 그저 순순히 그 궤변을 받아들인다. 그와 동시에 친구와의 관계가 어그러질 것이 겁이 나서는 우정이 깨질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친구를 지옥에서 구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진퇴양난이겠지만,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 내 친구가 단지 믿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생겼는데 그걸 방치한다는건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볼 수 있겠다.
 
개신교도들은 참으로 무례하다. 타인을 두고 신자와 불신자, 믿는 자와 아직 믿지 않는 자로 이분법적인 잣대를 두고 정의한다. 믿지 않는 것이 결론인 불신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와 다른 비종교인 혹은 타종교인을 두고 미완의 존재로 여기며 감히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대상으로 넘보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자신들의 교회에 데려와 헌금을 같이 쏟아넣는 노예로 전락시키고 싶어하기도 하고 말이다.
정작 자신들이 내는 헌금이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빈자와 가장 낮은 이들에게 돌아가는게 아닌 목사의 사유재산 증식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진짜로 모르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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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목사 이야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이 청빈한 삶을 살며 진실로 예수의 가르침을 세상에 퍼뜨리고 몸소 실천하며 사랑으로서 중생을 대하겠다는 마음은 참으로 갸륵하고 숭고하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삶의 태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혼자만의 삶일 때의 일이다. 내 옛 지인 중에는 아주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장녀가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 속, 아버지의 신앙을 강요받으며 혼자만의 공간 하나 없이 온 가족이 한 방에 부대끼고 살아가야만 했던 시간 속 방치되듯 자라난 이였다.
모든 아이들은 안전한 가정 속에서 풍족하진 않더라도 부족하고 아쉽지 않은 물질 속에서 사랑을 받고 자랄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그 아버지라는 목사는 신에게 헌납한 자신들의 삶 속에 아이들을 끌어다 패대기쳤고, 신의 이름 아래에 방치했던 것이다. 개척교회를 열고 신의 뜻을 사는 것은 자신의 선택인데 왜 그것을 선택할 권리조차 갖지 못하고 강요당한 아이들마저 그 거칠고 험한 역경의 삶 속에 던져 내팽개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과연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허락한 목사와 그 자식의 삶이라는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목사가 아니라 카톨릭의 사제가 되어 독신의 몸으로 그의 온 생애를 신에게 바치고 스스로의 인생만을 가지고 신의 사랑을 증명했으면 될 일이다. 그걸 원했을지 아닐지 알지도 못할 영혼들을 끌어내 억지로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목사도 인간이다. 인간이기에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 카톨릭의 사제와 수도사 같은 직책이다. 그들은 인간의 욕망을 완벽히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기에 신에게 종신서원을 하는 이들에게 독신을 요구했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 자체를 차단하는 것을 완벽히 성공시키지 못했기에 다양한 부작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절제에 실패해 일그러진 형태의 욕망은 체자레 보르자(Cesare Borgia)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들의 숨겨진 사생아를 만들어냈고, 오래된 수도원에서 발견되는 물웅덩이 속 아기 인골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절제와 종교개혁, 계속되는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려 노력했다.
성직자에게 필수로 요구되는 독신은 카톨릭의 최소 방어선과 같은 수단이였던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개신교는 애초에 이 방어선 자체를 걷어내버렸고, 이에 따라 목사들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 가족, 내 자식, 내 2세, 내 후손이 생기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내 유전자를 이어받은 이에 대한 염려와 그들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낫길 바라는 욕망을 꺾을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문명을 여기까지 달려오게 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목사는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위험을 안고 있으며, 많은 초호화 대형교회나 이단으로 여겨지는 각종 사이비 목사들이 그 증거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청빈한 목사는 삶의 무게를 자식의 등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사랑이라 여기며 방치하고, 부유한 목사는 예수의 가르침인 청빈을 어기며 타락하는 것, 둘 중 하나를 피해 갈 수는 없어보인다.
자식 입장에서는 전자보다 후자가 낫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대형교회 목사는 ‘더글로리’에 나오는 최사라 처럼 비싼 돈을 들여 해외로 유학을 가고 신도들이 모아서 낸 헌금으로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리니 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감언이설을 들려주고 가스라이팅으로 속여 십일조니 백일조니 하는 각종 명목으로 뜯어낸 헌금이 순수할 리가 없다. 그 속에는 분명 헌금을 가져온 이의 가족과 자식들의 울부짖음이나 불만이 섞여있을 때도 있기 때문이며, 정작 예수는 화려한 성전을 경계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는 자비(Mercy)를 베풀라 가르쳤지, 제사(Sacrifice)를 권했던 적이 없다. 그는 당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을 이웃이라 인정하고 그들에게 가 물을 얻어 마쳤으며, 자신들을 배척하는 로마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 청하였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당시 남자의 부속물이자 가축으로 여겨졌던 여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했다. 예수는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e)를 사도 중의 사도(Apostle to the Apostles)로 대했음에도 훗날 그의 제자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저 막달레나를 탕녀, 악마가 깃든 여인 등으로 폄하하는 구절을 추가했다. 정작 베드로가 예수를 3번이나 부정할 때, 막달레나만큼은 그의 곁을 지켰고 그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음에도 말이다. 교황의 관은 베드로가 아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얹어져야 마땅했을 것이다. 
 
위대한 성자의 가르침을 살아 생전 직접 받을 영예를 감히 누리고도 베드로는 같은 제자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질투하기에만 바빴다. 지금의 개신교인들이 하는 맹신과 타인에 대한 무례와 모욕이 다 어디서 왔는지는 뻔한 일이다.
 
생전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본 적도 없는 바울이 감히 예수의 수석제자이자 로고스(Logos / λόγος)의 계승자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위업을 축소시키고 왜곡하여 단지 구원받고 순종했을 뿐인 여성상에 깎아 끼워넣은 것 역시 지금의 개신교를 엉망으로 만든 초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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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을 설명하라는 식의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천국을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는 너무도 모순이 많은 궤변으로 이뤄져있다. 또한 불신자를 모욕하고 겁 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교회에 나와 돈을 바치고 공짜노동을 하게 만들기 위해 포교를 하는 이들과 같은 천국에 떨어지고 싶지도 않다. 범죄자도 악인도 ‘회개’ 한마디만 하고 신자가 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그런 천국따위, 대체 누가 바라는가? 
 
생각하는 것을 금지하고 사유(思惟)하는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종교의 천국은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를 빼앗긴 로고스(Logos / λόγος)의 지옥일 것이다. 우시아(Ousia / οὐσία)조차 성립하지 않는 천국이 과연 진정 낙원의 이름을 달고 천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을, 쓰레기를 나눠주며 행인을 향해 저주와 모욕을 일삼던 이들은 그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딱하고 가엾은 중생일지도 모른다. 눈과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이 가혹한 현실을 살아갈 자신이 없기에 무언가를 맹신하고 생각하고 사유할 권리를 반납한 채 이 거대한 사기극 속에서 쉴새없이 춤을 추며 무아지경에 취하기를 선택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초기 기독교가 영지주의와 마르키온 파 같은 세력을 이단으로 찍고 배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뇌 빼고 맹신하는 광란의 종교가 되어 만인의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말도 안 되는 비논리는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고, 불신자와 신자로 세상을 양분하는 흑백논리 또한 그들의 교리 속에 자리잡지 못했을테니. 스스로 생각하고 나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분명하나, 남에게 묶여 이끄는대로 끌려가는 것은 삶이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어떤 존재를 배불리 먹이고 집단의식을 이용해 존재를 키워 부풀리는 수단으로서 신앙을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하니, 노예이자 배터리로 스스로를 전락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말하지 않았다.
후대의 인간들이 멋대로 바울의 서신서 (Pauline Epistles)를 두고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아무리 악하게 살더라도 믿기만 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정의했을 뿐이다. 그들은 이 불안하고 험난한 세상 속에 던져져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갈 용기 대신 자기들끼리 뭉쳐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배타적인 사상으로 우리가 아닌 타자를 배척하는 것으로 자존심과 구원을 얻는 것이다. 가장 예수를 믿고 그를 숭배하며 기대고자 하는 이들이 감히 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그의 명예를 지옥에 쳐박는 것이다.
 
무지몽매하고 질투에 찬 베드로의 후예들이 눈을 뜨고 깨어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후예를 이단으로 몰고 박해하며 그들의 종교를 신성하다 왜곡하면서 이어왔던 것에 지나지 않기에, 그들은 눈과 귀를 가리고 맹신 속에 스스로 사유하는 힘을 잃고 천국이라는 이름의 지옥에 끝없이 추락하면서 스스로가 개돼지가 되었음조차 깨닫지 못하고 낙원을 향해 날아오른다 여기며 광기 속에 미소지을 수 있는 것이다.
 
헛된 천국을 맹신하며 몸을 불태우는 이들은 마치 예수가 사용한 잔을 성배라 칭하며 찾아 헤메는 이들과 닮아있다. 그저 식사를 했던 집 주인에게 찾아가 그 잔을 내어달라 하면 간단히 해결되었을 일을 가지고 예수의 피가 담긴 성스러운 잔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성배는 San Greal(Holy Grail)이 아니라 Sang Real(Holy Blood)가 아니었을까? 학자들이 말하는 해석대로 그것은 액체를 담는 잔이 아니라 예수의 로고스를 온전히 계승한 마리아 막달레나 그 자체를 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 앞에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이들이 눈앞에 보이는 성배를 두고도 부정하였듯, 그들 역시 예수가 남기고 간 가르침을 왜곡한 종이조각을 붙들고 노력 없이 대가를 바라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들이 나의 호수에 먼저 돌을 던졌기에 나도 물결로서 답하겠다. 
그대들이 좋아하는 성경 속 베드로에게 막달레나로서 답하겠다.
길에서 만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베드로의 후예들이 벼려낸 롱기누스의 창으로서 그대들을 찌르겠다.
 
사유하는 힘을 거세당하고 생각을 버린 가축이 되어 들어가야할 도축장을 천국으로 여기며 살아가느니, 거친 황야일지라도 숲을 가꾸기 위해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내 천국, 내 낙원은 내가 섭리 속에 스스로 찾아내겠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낙원을 말이다. 위대하고 자비로운 성자 예수께서도 분명 이것을 존중하고 축복하실 것이라 믿는다.
 
예수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주앉아 하늘의 별들을 헤아리며 수없이 많은 사유와 지혜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너희와 같은 베드로가 마주앉을 자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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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천국, 막달레나의 낙원: 고라니 목장

아브라함 계통 종교, 그 중에서도 한국에선 유독 개신교는 항상 타인에게 숨쉬듯이 무례하다.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 무리를 발견했다. 보통 전단지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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