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이가 있는 지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벌써 몇달도 더 전의 이야기이므로. 하지만 아이 엄마는 뱃속의 태아가 딸이 아닌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절망했으며, 그토록 고대하던 공주님 놀이를 할 수 없다느니, 아들은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무조건 남편에게 육아를 일임하겠다느니 하며 자기 딴에는 나름 우스개소리를 했었다. 참으로 불쾌한 이야기를 농담삼아 던질 수 있다니, 그 발상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고 평소와 다르게 평온하게 넘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부모에 의해 선택권 없이 세상으로 불려오는 것이기에, 부모는 초대한 자로서 최선을 다해야한다.” 라고 응수했고, 아이 엄마는 변명을 하듯 아이의 태몽을 이야기하며 아이가 자신에게 와준 것이라고 웅얼웅얼 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변명이 되지 않는다. 섭리와 윤회, 그리고 업보와 인연의 법칙에 따라 부모에게 자식이 찾아올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아이를 갖기로 결심하는 것도 부모,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는 것도 부모, 아이를 만드는 것도 부모다. 문 밖에서 아무리 기다리고 노크를 하여도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이승 혹은 이 세상의 안쪽에서 문을 열어주고 초대해주는 존재가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명의 탄생은 자식이 아닌 부모에게 결정권이 있는 것이며, 선택권을 아이가 가질 수는 있어도 결국 최종승인은 엄마와 아빠가 내려주지 않으면 아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지인의 말에 대해 “그렇다 해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도록 결정한 것이 부모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라고 했고, 그 지인은 한참을 말이 없더니 갑자기 대화 주제를 바꿔 자신이 중고로 유모차를 산 이야기를 꺼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이게 바로 인지 부조화 라는 것인가? 아니면 책임 회피라는 것인가?
남의 일에 화를 내는 것이나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남의 일일 뿐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효율적인 일인 것을 알았음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망언을 들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한다.
“딸이 태어나면 공주님 놀이를 하고 싶었다.”
“아들은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는 것과 입 밖으로 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그럴 수 있을 수 있지만 후자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무엇이 틀렸는지조차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문제를 갖기 때문이다.
몇년 전만 해도 딩크(Dink)라며 소꿉친구(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속 3번 유형인 급조형)에서 커플로 이어졌다는 그 부부는 항상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여행을 떠나고 다양한 이벤트를 즐기곤 했다. 자신의 몸이 약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그 지인은 어느날은 나에게 그 지인이 “왜 결혼을 안 하느냐?” 라고 물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내 생각을 들려주었다.
“내가 태어나 살아보니 세상은 살아볼만한 곳은 아니였다. 내가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기에 나는 이 세상에 누군가를 초대하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결혼과 부부생활을 선호하지 않는데, 나로 인해 누군가가 아이를 원하는 미래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 또한 원치 않기에 나는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기로 한 것 뿐이다.”
이렇게 대답한 후로는 내게 연애나 결혼의 의사를 묻던 지인의 목소리는 뚝 끊어졌고,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내 진심이 담긴 신념을 전함과 동시에 그 둘의 딩크라는 선택을 존중하는 의사도 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가져와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니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할 수 밖에.
이 이야기에 앞서 예전에 쓴 일기들을 가져와 참고하며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 외로움의 무게 https://shearestis.tistory.com/109
외로움의 무게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무게를 견디며 고통을 겪고 외로움에 사무치며 살아간다.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선택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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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형태 정리 https://shearestis.tistory.com/99
사랑의 형태 정리
사랑의 4단계 위계1. 최선의 사랑 • 정의: 서로가 서로의 진정한 이해자이자 등을 맞댈 수 있는 전우/파트너.• 특징: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무언가를 해주는 것에 대해 손해라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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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장을 보낼 권한 https://shearestis.tistory.com/119
초대장을 보낼 권한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아이를 잉태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것은 아이를 이 세상에 초대하는 것이다. 남녀는 부부가 되고, 부부는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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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https://shearestis.tistory.com/120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독 인상깊게 기억이 나서 써보고자 한다. 엄마가 외출할 때 집에 물건을 하나 놓고온 일이 있었다. 사실 흔한 일이다. 그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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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주는 행복
흔히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있어.’ 어떻게 들으면 참 예쁜 말이라고 들릴 수도 있다.하지만 내 귀엔 도저히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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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오늘도 싱글벙글(은 무슨) 좀비같은 걸음으로 아침 요가를 하러 가는 길에 버스 옆면에 붙은 ‘결혼정보회사’ 광고를 봤다. 마음속으로 ‘싱글이세요? 전 벙글이에요.’ 같은 어디서 주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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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https://shearestis.tistory.com/128
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동창 중에 결혼 소식이 들려오는 친구가 있다. 솔직히 좀 놀라웠다. 이 친구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명품을 좋아해서 엄마의 가방을 가져와 자랑하듯 걸치며 이건 무슨 브랜드라고 고작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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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들은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https://shearestis.tistory.com/132
그대들은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해 많은 예언가들과 예언서가 20세기의 끝과 종말을 경고했음에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아니, 인간들의 눈에는 끝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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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남아선호사상’ 이라는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 남자 아이를 선호하는 사상인데, 이로 인해 20세기의 끝자락에서 많은 여자아이들이 뱃속에서 단지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낙태를 당하였고, 태어난 여자아이들도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하거나, 반찬과 먹을것을 두고도 차별을 받았다. 식사 시간에 남자 상과 여자 상으로 나눠져 밥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상에 오른 반찬의 가짓수와 종류가 달랐던 것 또한 흔한 일이였다. 심지어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까지 있었고, 장녀만이 아니라 차녀, 삼녀 그리고 뒤에 태어난 많은 딸들이 배움을 위해 책을 쥐는 대신 공장과 일터로 보내져 집안의 살림과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이른 나이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벌어온 돈으로 아들들을 교육시키고 더 나아가 아들을 장가 보내는데에 쓰기까지도 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또다시 시대가 바뀌어서 반대로 ‘여아선호’의 시대가 와버렸다. 다행히도 그때처럼 뱃속 태아가 남아라고 지우지도 않고, 남아가 태어난다고 해서 그 아이를 차별하고 서럽게 만들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남자가 집안을 일구고 부모를 부양했으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여자가 부모를 부양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인권이 올라가고 남녀평등이 이뤄짐에 따라 여자들이 사회에 진출해 당당히 돈을 벌고 남자와 같이 인간으로서 목소리를 내게 되었음에 따라 여자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찾아 뵙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남자보다는 여자가, 남편보다는 며느리가, 사위보다는 딸이 자신의 부모를 모시고 병원을 찾아가고 간병을 하고 여행을 보내드리고 때로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까지 하는 것이였다. 소소하게 자주 찾아가 살림을 챙겨드리고 용돈을 드리며 손주들을 데려가 재롱을 보여주는 등 노년의 즐거움과 감정노동을 아낌없이 하는 여자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남아선호에서 여아선호로 돌아서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키우기 어렵다는 것도 한 몫 했을테고 말이다. 과거에는 남자아이의 양육 난이도를 감수할만큼 남아를 선호할 메리트(Merit)가 있었고, 지금처럼 아이를 적게 낳아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는 대신 여러 아이를 낳고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돌보고, 아이를 들에 풀어놓은 양처럼 방목해 기르는데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일손이 되었을테니 당연히 남자아이를 선호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여자아이를 선호하게 된 것일 뿐이고.
지금과 그때의 공통점이 있다.
남아선호도 여아선호도 모두 하나같이 부모가 자식을 ‘수단’으로 삼았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자식은 성별에 관계없이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세상에 초대받은 자로서 엄마와 아빠의 무한한 사랑과 보호 속에 자라날 권리를 갖는다. 그런 존재에게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남자아이가 좋겠다느니, 여자아이가 좋겠다느니 왈가왈부 하는 것은 분명 옳지 못하다.
그럼 아이의 성별을 상상하며 기대를 품는 것 자체가 죄악인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아들이 태어나면 같이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며 뛰어놀겠다, 딸이 태어나면 머리도 묶어주고 예쁜 옷과 인형을 사주고 매일같이 공주님처럼 대하겠다 하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것은 분명 아름답고 기쁜 일이다.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무언가를 상상하며 초대한 이를 대접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하는 것은 결코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티를 주최하고 손님을 초대한 호스트(Host), 호스티스(Hostess)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니까. 이것은 순수하게 아이를 목적으로서 대하고, 그렇기에 그 아이를 존중하기 위해 부모로서 무엇을 할 지, 해야할지, 할 것인지를 진지하고 즐겁게 상상하고 기획하는 것은 초대한 이로서 마땅히 그래야할 의무이자 주최자로서의 기쁨이자 행복인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지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아이를 ‘수단’으로 여겼기에 나온 망언이였다.
아이의 성별을 듣고 속으로 실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 타인의 귀에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농담이라 할 지라도 단 한 방울의 진심이 없이 입 밖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성별을 듣고 내가 생각한 파티의 이벤트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주최자로서 파티의 내용을 바꾸고 즐겁게 초대한 손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면 그만인 것을 두고 벌써부터 아이의 성별을 감당할 수 없다며 포기를 선언하거나 아이와 하고싶었던 일을 두고 그걸 못 하게 되었다며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니.
아이가 자신에게 와줬고 아니고를 떠나서 결국 아이가 깃들 몸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도, 그 몸을 10달동안 뱃속에 품기로 한 것도, 이 세상 밖으로 낳아 인간으로 만들기로 한 것도 부모인데 단지 자신이 생각한 손님의 모습이 아니라고 대놓고 실망을 한다니… 막말로, 손님을 초대했는데 손님이 입고 온 옷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손님을 향해 “실망이네요.” 라고 면전에 말을 내뱉는 파티의 주최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자식의 귀에 안 들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마음을 갖고 타인에게 꺼내놓는 사람이 과연 아이를 키우는 내내 그 마음을 감출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화가 난건 아마도 그 지인이 아이를 초대객으로서 존중하는 것이 아닌, 수단으로서 혹은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도구로서 여겼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존중과 사랑 속‘초대’가 아닌 그저 ‘납치’로 인한 패대기로 느껴지는 것은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딩크가 아니라 그냥 출산보류자(出産保留者) 였을지도 모르겠다. 딩크를 결정한 이유도 나와는 다르게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으니,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비출산에 대한 결정을 내린 결과는 같을지라도 그 결정 과정이 아이를 수단으로 대하는지, 목적으로 대하는 지에 따라 다르다면 그것은 분명 같은 결과값을 가질지언정 전혀 다른 판단인 것이다. 칸트(Immanuel Kant)가 들으면 정언명령이라는 이름의 몽둥이를 들고 뛰어올지도 모를만큼.
내가 고상하고 그가 천박하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딱히 그를 비난하려고 일기장을 꺼낸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그냥 이 생각이 몇달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답답한 마음에 끄적끄적 써내려갔을 뿐이다. 왜 나도 이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다만 모든 영혼에는 섭리가 태초부터 새겨준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우시아(Ousia / οὐσία), 로고스(Logos / λόγος)가 빛나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절대 저러한 생각을 품을 수 없을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을 뿐이다.
◈◈◈
내게는 강아지가 있다. 올해 생일을 맞이하면 11살이 되는 나의 작은 강아지는 내 손바닥 한줌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에 까만색 솜털을 잔뜩 달고 엄마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의 가족이 되어주었다. 내 강아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나는 어쩌면 바라지 않는 삶을 내 강아지에게 강요한 것이다.
데려온 날부터 강아지가 쉬야를 가릴 때까지 우리는 항상 거실 맨바닥 차가운 곳에 배변 패드를 잔뜩 깔아놓고 함께 잠이 들었고, 나는 차가운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강아지가 배변을 가리게 만드는데 성공했고, 우리는 드디어 이불을 깔고 함께 잘 수 있게 되었다. 내 강아지는 이가 자라며 가려웠는지 딱 한번 벽지를 갉아 먹다 들키기도 하고, 내 책의 커버 끄트머리를 갉아 먹기도 했다. 그게 뭐라고 나는 강아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를 냈고, 나의 소심한 강아지는 식탁 바닥에 들어가 온 몸을 납짝하게 엎드리며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달달 떨어댔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나의 선택으로 데려온 강아지가 말썽 한번 부렸다고 이렇게 두려움에 떨 정도로 훈육을 하다니, 얼마나 잔인한 선택이였나. 그 순간 나는 두번다시 이 아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겠다고 나 자신에게 깊게 다짐했고, 다행히도 11년이 다 되도록 그 마음은 지켜지고 있다. 나는 그 날 그 순간 이후부터 단 한번도 내 강아지를 향해 목소리를 높힌 적이 없고, 고맙게도 내 강아지는 나를 든든한 누나로 여기며 항상 어리광을 부리고 고집을 피우고 제멋대로 굴며 내 속을 썩이며 살고 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강아지는 어릴 적, 바닥에 누워있는 나에게 다가와 내 귀를 핥아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으며 간식을 먹겠다고 꼬리를 살랑대며 아빠에게 온갖 애교를 부리고는 아빠를 자신의 최애로 점찍기까지 했다. 다시 외국으로 나가야 하기에 나는 가족들과 남겨질 강아지를 위해 10만원어치의 장난감을 구매하고 푹신한 방석을 여러개 사서 집안 곳곳에 놔주었다. 아직도 그 까만 솜뭉치가 처음으로 올라간 방석 위에서 북극여우가 사냥을 하듯 폴짝 뛰며 신기해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1년만에 귀국한 나를 잊지 않은 내 강아지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안겼고 한참을 버둥대며 내 품에 안겨 떠나지 않았다. 아마 나를 그리워 해줬던게 아닐까 하고 감히 생각해본다. 강아지는 무럭무럭 자라 천방지축이 되었고 매일같이 나와 산책을 나가고 놀이를 즐기고 맛있는 것을 얻어먹으며 즐겁게 살았었다. 하지만 비극이 찾아왔다.
내 강아지는 에디슨 증후군에 걸렸다. 어느날부터 좋아하진 않지만 나가자고 목줄을 가져오면 마지못해 따라나서던 산책 길에 자주 주저앉았다. 놀아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며 달려왔을 녀석이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기력없이 잠만 잤다. 옆구리의 털이 빠지기 시작했다. 항상 직접 만들어주는 맛있는 밥을 거부하고 심지어 간식마저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한달에 한번 찾아가는 수의사 선생님이 명의가 아니였다면 분명 내 강아지는 내 품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과잉진료를 단 한번도 하지 않는 선생님께서는 그날 내게 정밀검사를 해보자 하셨고, 그 결과 강아지는 에디슨 증후군을 진단받았다.
하루에 2번, 12시간마다 한번씩 처방약을 먹이면 된다고 하지만 절망스러웠다. 왜 하필 나의 강아지에게 이런 병이 생겼는지, 그리고 내가 눈치채지 못해 내 강아지를 하마터면 잃을 뻔 했다는 것이 공포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주저앉아 울고 있어도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기에 강아지를 안고 돌아온 그날 바로 에디슨 증후군에 대해 검색하고 여러 사이트와 유튜브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해외 사이트를 뒤졌고, 혹시 하는 마음에 인간에게도 에디슨 증후군이 있다 하여 인간의 병도 검색해 지식을 닥치는대로 긁어모았다. 미역이 좋다고 하여 매 끼니마다 소금기를 제거한 미역을 잘게 다져 밥에 넣어 먹였고, 알람을 맞춰 잊지 않고 약을 먹였다. 자다가 돌연사 할 수도 있는 병이라 하여 매일 밤 자다가 새벽에 몇번이고 깨어나서 강아지의 숨소리를 체크하는 삶이 몇 달동안 이어졌고, 다행스럽게 내 강아지는 기력을 찾았다.
건강을 잃고 지쳐버린 강아지를 내 욕심에 억지로 살려두는게 맞는지 고민할 때도 있었다. 사실 너는 쉬고 싶은게 아닐까 하고. 나 역시도 억지로 주어진 삶을 이어가는 것이 그리 기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함 있는 몸에 갇혀있는 것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있기에 만일 내가 스스로 움직이거나 사유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면 기필코 나 스스로 내 목숨을 끊거나 안락사를 하겠다는 결심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있기에. 그래서 강아지가 너무나 괴로워서 힘들어하는 순간이 온다면 보내줄 결심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강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든 투병 생활을 견뎌준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내게는 포기할 권리가 없다. 내 강아지는 나에게 온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영원히 나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고 나를 착취할 권리가 있으며 나에겐 그것을 들어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번의 검사와 치료 끝에 수의사 선생님은 더이상 처방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판단하였고 완치라는 개념 자체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내 강아지는 지금도 정상적이게 잘 살고 있다. 노견인 것을 감안해도 여전히 건강하고, 어쩔 수 없는 병증이 있긴 하지만 매일같이 꾸준히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며 한 달에 최소 한번은 병원에 데려가고 있는 것이다.
◈◈◈
강아지와 인간을 동일한 선상에 올려놓는 것이 맞느냐고 하면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이라 해서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하다 하기엔 자연에 존재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들은 모두들 소중하다 생각한단 말이다.
나는 분명 내 강아지를 수단으로 삼아 데려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강아지를 수단으로 대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하기에 나는 출산으로서 이 세상에 누군가를 초대하려는 인간에게 예의를 요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동물들과 다르게 우리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출산으로 인해 이 세상에 태어날 존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고 어떤 삶을 겪을지 예상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살아온 세상에 대해 평점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므로.
나는 매주 칼을 들고 브로콜리, 컬리플라워, 양배추, 적채, 표고버섯, 당근을 다듬고 잘게 자른다. 단호박을 쪄내고, 매일같이 팬에 물 250ml를 붓고 쌀밥 한 스푼에 야채모듬 조각과 단호박을 넣고 팔팔 끓여 먹기 좋은 강아지밥을 만들어 먹인다. 몸에 좋다기에 올리브유와 참기름도 한 티스푼씩 둘러넣고 푹 졸여낸 보드라운 밥을 만들면서 단 한번도 귀찮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좀 손이 많이 가서 힘이 들긴 하지만 이걸 하는 것에 있어 후회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힘들게 만든 밥을 강아지가 맛있게 먹어서 건강하고 기운차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밥을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면 화가 나는 대신 어디가 안 좋은지 걱정이 되어 밥그릇을 들고 쫓아다니며 한입만 먹자고 입천장에 밥을 발라주고 어르고 달래 몇 숟갈이라도 떠먹이는 것에 귀찮음이라는 감정은 끼어들지 못했다.
내가 잘나고 고고하다고 자랑하려고 쓰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냥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을, 받아 마땅한 이에게 당연히 내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인간도 다르지 않을것이다. 태어나줘서 고맙고, 내게 와줘서 고맙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마워야 하는것이 맞는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부모는 세상을 살아보았을 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은 태어나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고 자신들의 삶 역시 그래왔다면 누군가를 초대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에 따라 부모는 아이에게 결함 없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몸과 거친 세상의 풍파를 견딜 수 있는 물질, 그리고 낙원을 만들어줄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따뜻한 가정을 선물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이를 자신이 원하는, 갖고 싶었던 삶 속에 던져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대신 등불을 들고 앞에 서서 가야할 길, 가고 싶은 길을 비춰주며 응원하고 지지해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삶 또한 필수라고 생각한다. 엄격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생각을 꺾고 싶지 않다.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정권은 너에게만 있었다: 고라니 목장
얼마 전에 아이가 있는 지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벌써 몇달도 더 전의 이야기이므로. 하지만 아이 엄마는 뱃속의 태아가 딸이 아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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