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해 많은 예언가들과 예언서가 20세기의 끝과 종말을 경고했음에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인간들의 눈에는 끝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소행성이 떨어지지도 않았고, 대홍수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화산이 폭발해 세상이 불바다로 변하지도 않았고, 지진으로 대지가 쪼개지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21세기를 두고 세상의 끝이라 말한 옛 선지자들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의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가 사라진 것을 보았고, 그에 따라 이 세상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가 우리의 세계에 종언(終焉, Demise)을 고할 것 역시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프네우마의 빛도, 로고스의 지혜도 잃은 세상에 단지 우시아(Ousia / οὐσία)만을 남겨놓고, 프네우마에 의한 관성(慣性, Inertia)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매번 그렇듯, 글을 쓰기에 앞서 이전에 써둔 글을 참고해서 이어가고자 한다.
◆ 진리 탐구 메모 https://shearestis.tistory.com/98
진리 탐구 메모
트리니티 시스템 (The Trinity System: Providence)이건 어릴적부터 내가 감으로 느껴오던 것을 2025년 12월 4째주 일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누워있다가 할 일이 없어서 대충 끄적여 언어화한 낙서임.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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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멸망의 6대 형이하학적 상수 https://shearestis.tistory.com/100
인류 멸망의 6대 형이하학적 상수
• 기술 (AI/로보틱스): 인간의 노동 및 존재 가치의 물리적 상실.• 환경 (지구온난화): 3차원 생존 기반인 지구 환경의 하드웨어적 파괴.• 생물 (이디오크러시): 고지능 개체의 비출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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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https://shearestis.tistory.com/101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팍스 로마나를 붕괴시킨 트리거는 로마인의 타락이였다.그들은 각종 신비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졌고, 더불어 그 끝에는 지금 우리가 부르는 LGBTQ까지 향락주의의 일부로 귀족과 지배계급들의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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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의 무게 https://shearestis.tistory.com/109
외로움의 무게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무게를 견디며 고통을 겪고 외로움에 사무치며 살아간다.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선택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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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주는 행복 https://shearestis.tistory.com/121
아이가 주는 행복
흔히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있어.’ 어떻게 들으면 참 예쁜 말이라고 들릴 수도 있다.하지만 내 귀엔 도저히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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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2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세상에는 참 듣기 좋은 말이 많다. “너는 소중해”, “네 기분이 곧 법이다” 와 같이 인간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삭제한 채 감성(Pathos,πάθος) 만을 자극하는 비논리적인 포장지로 둘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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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형태 정리 https://shearestis.tistory.com/99
사랑의 형태 정리
사랑의 4단계 위계1. 최선의 사랑 • 정의: 서로가 서로의 진정한 이해자이자 등을 맞댈 수 있는 전우/파트너.• 특징: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무언가를 해주는 것에 대해 손해라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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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4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오늘도 싱글벙글(은 무슨) 좀비같은 걸음으로 아침 요가를 하러 가는 길에 버스 옆면에 붙은 ‘결혼정보회사’ 광고를 봤다. 마음속으로 ‘싱글이세요? 전 벙글이에요.’ 같은 어디서 주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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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장을 보낼 권한 https://shearestis.tistory.com/119
초대장을 보낼 권한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아이를 잉태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것은 아이를 이 세상에 초대하는 것이다. 남녀는 부부가 되고, 부부는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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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끝으로 인류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형이상학과 철학의 날개를 잃고 나머지 한쪽인 형이하학의 날개만을 강하게 퍼덕이면 하늘을 날아 아득히 먼 별들을 향해 손을 뻗고 이번에야말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감히 생각했다.
두번의 세계대전과 수없이 많은 침략과 약탈, 그 속에서 정신적 가치는 가차없이 버려지고 무용(無用, Useless)한 것으로 여겨졌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한쪽 날개를 주워 든 인간들이 다시 그 날개의 가치를 깨달았으며, 그에 따라 다시 우리는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인간은 등이 따시고 배가 부르면 항상 딴생각을 하는 종족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늘 그래왔듯 팍스 아메리카나의 넘치는 자원 속에서 인간들은 또다시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일어났으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미 많이 언급했으니 길게 쓰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번에 써보고자 한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AI와 로보틱스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은 꿈에 그리던 SF 영화나 소설, 만화와 같은 공상을 현실화 하는데 성공했다. 로봇청소기가 매일같이 바닥을 쓸고 다니고, 이름을 부르면 아이언맨의 자비스처럼 언제든 유능한 비서가 되어주는 각종 AI들이 로봇과 기계에 탑재되어 인간의 삶을 분에 넘치도록 유능하게 서포트 해주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위험한 근무지와 업무에 로봇이 배치되고, 인간들의 연산과 창작을 돕는 서브 뇌와 같은 개념으로 AI를 활용한다면 분명 더 많은 이들이 편하고 효율적이게 살아갈 것이며,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하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은 낙관(樂觀 ,Positive)이였던 것인지 인간들은 퇴화하기 시작했다.
짧은 쇼츠와 140자 제한의 짧은 글만 허용하는 SNS에 몰입하고, 알고리즘이 만들어준 에코체임버(Echo Chamber) 속에 안주하며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AI에게 의존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즐거움과 사유(思惟)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자들이 적지 않다.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 라는 문장이 나온다지만 작금의 현실은 언제나 그랬다는 말로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젠지스테어(Gen Z Stare)라는 문제를 시작으로 점점 낮아지는 소년범죄의 연령과 높아지는 범죄의 죄질,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감싸고 돌며 괴물로 키우는 나태하고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부모들의 정신 나간 합작이 지금 이 시대의 한 세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 위에서 언급한, 내가 독자적으로 생각한 <인류 멸망의 6대 형이하학적 상수>만 봐도 지금 태어난 아이들은 지옥에서 태어나 지옥을 살아가며 지옥에서 죽을 것이 뻔하다. 특히 2010년도생과 2020년생, 그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럴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이토록 풍요로운데 왜 이렇게 비관적인 말을 꺼내 자라나는 아이들을 향해 저주를 하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Pathos, πάθος)에 호소한다고 사실(Logos, λόγος)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인정하고 직시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때때로 사람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환상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대중의 근거 없는) 확신이다” 라고.
지금 시대의 부모들은 자신들은 구시대의, 자신들의 부모와는 다르게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다고 자부하는 세대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 생각하며 배움의 깊이가 있음에도 이 세상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의 무거움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으며, 단지 나이가 차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듯이 문 밖에 손을 뻗어 누군가를 잡고 세상에 납치해 패대기쳤다. 그리고는 나는 내 부모와 다를거라며 자신들이 어린 시절 그토록 원했던 것을 아이들에게 잔뜩 선물하며 부족함이라는게 뭔지 모르게끔 키우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를 인간이 아닌 괴물 혹은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키우고 있다는 것 조차 알지도 못하고 그저 그것이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서.
그 부모들은 자신의 결핍에 대한 트라우마를 자신의 자식에게 그대로 투사하며, 스스로의 결핍을 뒤늦게라도 채우려는 듯이 자식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안겨주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더불어 정신적 풍요까지. 무엇이던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구시대의 부모들이 방치와 학대 그리고 무지함으로 아이를 키워왔다면, 지금의 부모들은 과도한 관심과 통제, 압박 그리고 비틀린 사랑과 애정으로 인한 무지 속에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게 아니라면 자유와 존중이라는 핑계로 아이들을 방임, 방치하며 신세대 부모로서의 비대한 자아(Ego)를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대가로 아이들의 미래를 불태우고 있거나. 어찌 되었건 중간이 없다. 인간은 또다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인이 물려준 중용(中庸, 메소테스,mesotēs[μεσότης])이라는 가치를 망각하고 쓰레기통에 황금과 보석을 내버린 것이다.
내 부모가 주지 않았던 관심과 물질을 아낌없이 주며, 내가 부모에게 받고싶었던 ‘마음 읽어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려고 하나, 제대로 된 마음읽기에는 근접하지도 못한 채 그저 아이에게 휘둘리며 훈육이 배제된 또다른 방치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어렸을 적 그 시대의 야만적인 일부 교사들이나 못된 어른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를 기억하며 내 자식만은 그 상처를 받지 않고 자라게 하겠다고 같은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자라나 교사가 된 또래의 선생님들을 쥐 잡듯이 잡아대며 교권을 유린하고 타인의 학습권까지 침해한 결과가 수학여행과 소풍 등의 외부 학교 행사의 소멸과 운동회의 무승부 엔딩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대학과 자녀가 취직한 회사에까지 헬리콥터를 몰고 가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어질어질하기 짝이 없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들은 야만의 시대 속에 태어났을지언정 방치와 결핍 속에서 스스로 싸우고 쟁취하며 강해지는 법을 터득한 이들이, 정작 반드시 필요한 삶에 대한 투쟁을 자신의 자식에게는 배우지도 못하는 가축으로 만들어 부모의 지나간 결핍의 시간을 대신 보상받는 인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아이를 세상에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외로움과 결핍을 대신 짊어져줄 인형을 구매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난장판 속에 폰지사기를 쳐서 고결해야할 영혼을 멱살잡고 끌어와 패대기쳐 납치한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자라나며 풍요 속의 빈곤에 젖어들었다.
그들은 부족함을 몰랐으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꾸짖고 인도해주는 것이 아닌 그놈의 ‘마음 읽어주기’를 통해 긍정의 방치 속에 괴물이 되어갔다. 이러한 아이들이 어떻게 AI와 로봇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인재로 자랄 수 있을까?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도구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연산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AI, 인간의 신체구조와 힘의 한계를 초월해버린 로봇 앞에 인간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우시아 : Ousia / οὐσία)를 부정당하는 첫 시대를 맞이했고, 2010년 이후에 태어난 인간은 그 첫 세대가 된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이길 방법은 형이하학에는 없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인간은 형이상학으로 기계를 이길 수 있다.
당연한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당연하게 존재하는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우시아(Ousia / οὐσία), 로고스(Logos / λόγος)가, 기계에는 없기 때문이다.
AI의 연산능력이 아무리 높다한들 그는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하는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가 없으며, 로봇이 제 아무리 막강한 물리력을 가진다 해도 그에게는 로고스(Logos / λόγος)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AI가 로봇의 로고스(지능, 머리)가 되어주고, 로봇이 AI의 우시아(그릇, 육체)이 되어준대도 결국 그들에겐 무언가를 해야하는 동기, 그것을 바래야하는 이유로서의 프네우마가 태생적으로 결여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에는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 욕심, 욕망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이 프네우마를 극한으로 갈고닦은 형이상학적 정수가 바로 철학(哲學, Philosophy)인 것이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기술과 자원은 풍족하게 주었을지언정, 살아가야 할 이유와 태어날만한 세상을 주지는 않았다. 아니, 그걸 줄 능력이 없다는 것 조차 그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누군가를 세상에 패대기쳤고, 그것을 눈치챈 이들이 ‘낳음당하다’ 라는 표현을 만들어 이 비극을 정의했던 것이다.
초고속 호화 크루즈가 있다 한들, 초음속 여객기가 있다 한들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걸 타고 가야할 목적지가 없다면 배는 항구를 떠나 험한 바다로 나아갈 이유가 없고, 비행기는 굳이 중력을 거스르며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를 이유가 없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파괴 속에서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도망갈 기술을 개발한대도, 굳이 화성까지 가서 원하지도 않았던 삶을 굳이 이어가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낙원을 누려보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새로운 땅의 낙원을 믿고 떠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다가오는 인류 멸망의 6개 상수라는 기둥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가치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부모가 자신의 삶 속에 철학을 품고 자식에게 물려주고 가르치며 인도해야 한다. 하지만 부모는 철학이 없고, 자식은 그걸 받아들일 그릇조차 부모에게 받지 못하였다.
자기 자신이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생각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세상에 던져져서 우는 아이의 손에 끝없이 무언가를 들려주며 왜 우는지 생각하는 대신 울음을 그치게 하는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의 가슴 속에 대체 어떻게 자기만의 철학이 존재하겠는가?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물려줄 철학이 없으니 자연스레 그들의 자식조차 살면서 철학과 형이상학의 자리가 텅 빈 채로 자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힘겨운 투쟁의 길로 꺾어들고 그 누구도 주지 않았던, 거기에 있어 마땅했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철학을 쟁취하는 극히 적은 수의 인간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이 고통과 비극의 연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21세기까지 이어져 세상을 아름답고도 추한 곳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던 것인가? 그저 인류는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고 있었을 뿐인 것이 이 세상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버텨줄 아랫돌이 남아있지 않아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섭리다. 새 돌을 만들고 다듬어 쌓아올렸어야할 시간을 그저 임기응변으로 모면해온 대가를 이제서야 치루는 것이다.
나는 보았다. 아파서 혼미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 열과 싸우고 있었던 그 날, 황량한 폐허 속을 떠돌며 모래바람 속에 누더기를 입은 생존자가 도시의 폐허를 거닐며 구 문명의 잔해를 뒤적이며 새로운 것이 아닌 과거의 흔적에 기대 하루하루 연명하며 떠도는 외로운 삶을.
더이상 눈부신 문명의 황금도 없이, 재난과 재앙 속에서 국가와 사회가 해체되고 전쟁과 재해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문명의 정수를 모두 잃고 야생에 던져져 그날 하루를 넘기는 것에 불과한 지옥을 원치 않았음에도 그저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문명의 흔적인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옷을 기워 몸에 걸치고, 어딘가에 남아있을 통조림을 찾아다니며 내가 모르는 이가 나를 약탈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구시대의 유산인 신뢰와 평화를 잃은 채.
어쩌면 그것이 철학이 없이 낳음당하고 배양당한 세대가 겪을, 혹은 불러올 미래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수없이 많이 일어났던 유목민들의 약탈과 강대국의 식민지, 수없이 많았던 전쟁과 인류 전체가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세계대전들은 철학의 부재에서 일어났다. 내가 겪고싶지 않은 일을 남도 겪고싶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놓지 않으니 그리 쉽게 남의 것을 빼앗아 내 처참한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연명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외로움을 짊어져달라고 누군가를 낳아 세상에 패대기치고 사랑한다 우기며 비틀린 애정으로 키우는 것 역시 그것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는 아이들의 세상이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세상에 태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그들의 품에서 자라야 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과하게 제공하면 아이는 무언가를 스스로 쟁취해야 할 이유를 배우지 못한 채 자라고, 부모가 아이를 방치하면 아이는 세상에 나가기 위한 무기와 전략을 배우지 못한 채 자라게 되는 것이다. 과한것도 모자란것도 모두 다 너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언젠가 커서 어른이 된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2010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 나아갈 세상이 없다. 부모조차 만들어주지 않은 낙원이 세상 밖에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낙원을 만들어야 하는데, 낙원을 만들 도구는 있을지언정 낙원을 만들어야할 이유와 능력은 없는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의 감으로는 2045년에 분명 세상은 역변할 것이다. 2025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자마자 세상이 역변해버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인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이 세상에 패대기 쳐놓고 정작 자신들은 지옥을 겪지 않고 먼저 떠나갈 것이다. 그들이 만든 지옥은 오롯이 아이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을 다시 무(無)로 돌려보낼 수도 없다. 그러니 최선책(最善策, Best option)을 놓쳤다면 차선책(次善策, Second best option)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지옥이고 자신의 욕심으로 세상에 너를 패대기쳤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마땅한 보상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줘야 한다. 낙원은 없을지언정 주어진 삶을 낙원이라 정의하는 법을 알려주고, 낙원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 그리고 삶의 철학을 아이들에게 인스톨(Install) 해줘야한다.
다가오는 기후재난과 지구온난화가 불러올 환경변화, 자연재해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질 3차 세계대전, AI와 로보틱스의 발전과 잠식 속에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정의하고 빛나고 싶은 욕망(프네우마 : Pneuma / πνεῦμα)을 가질 수 있는 자만이 인간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봐야 아무도 듣지 않을 것도 잘 안다. 아마 “내 아이에게 저주하지 말아라 이 염세주의자야!” 라며 그들의 치맛자락과 외투 속에 아이들을 끌어안고 눈과 귀를 막으며 소리를 지를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인간의 사정을 봐가며 흐르지 않는다. 사실을 외면한대도 현실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기에.
외면한 자의 자식은 부모가 외면한 대가를 상속받아 대신 치뤄야 할 것이나, 직시한 자의 자식은 부모가 직시한 현실 속에서 찾아낸 가치와 답을 상속받아 한번의 위기를 겨우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지만 한숨조차 돌리지 못하고 추락하는 이가 되는 것 보다는 무너지는 절벽에서 살아남아 잠시 한숨이나마 돌리고 다음 지옥을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지옥을 건네준 죄인은 변명할 자격이 없으니, 그 지옥에서 만일 아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고 싶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써서라도 그 바램을 이뤄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야”,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같은 감성론에 젖어있을 여유따위는 없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뒤늦게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공수표를 던지며 의미없는 사과를 하는 것은 그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아이는 태어나버렸고, 아이를 낳기 전에 당연히 심사숙고 해야했을 수없이 많은 시간들을 무책임하게 외면한 사실은 변하지 않을테니까.
지금 할 수 있는것은 손에 들고있던 취미용품과 게임기, 마우스를 내려놓고 당장 아이를 위해 시간과 자원을 올인(All-in)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를 향한 나약한 위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몰려오는 파도를 탈 수 있게 뭐라도 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가 선택한 길을 되돌아 갈 수 없다면 적어도 그 길에 패대기친 이가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단단한 방파제가 되어줘야 할 것이다. 저지른 죄에 대한 보상과 대가를 철저하게 남은 인생의 모든 시간과 자원을 써서라도 아이에게 배상해야 할 것이 아닌가?
사랑을 호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실천과 증명 속에서 정의 되는 것이지, 나 스스로가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삶은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증명 속에 죽은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이 그를 추억하며 정의하는 것이다. 사랑 또한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그대들은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고라니 목장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해 많은 예언가들과 예언서가 20세기의 끝과 종말을 경고했음에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인간들의 눈에는 끝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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