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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염치없게 숟가락을 얹는 자에게

불꽃 K장녀가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사연

 

오랜만에 해외에 사는 친척이 한국을 방문했다. 적어도 한달 전에는 온다고 말해줄 것이지, 내가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바로 어제였다. 하다못해 내가 오늘 다른 스케줄을 미리 잡고 있었다면 그걸 조정해야 했을테고, 매우 곤란하지 않았겠나?  투덜대는 마음과 함께 갑작스레 들이닥친 친척을 만나게 되었다. 대체 무슨 용건으로 한국에 방문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나의 조부모님께 딱 붙어있었다. 그 모습에는 자연스러움과 친밀함이 아닌 어떤 의무감과 부채감이 느껴졌다. 조부모님 역시 평소와는 다르게 자연스러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고 말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멀리 사는 손주와 많이 대화를 나누면 좋을 것이다. 나야 뭐 근처에 살며 수시로 찾아와 자잘한 심부름을 하고 집안일을 대신 해드리며 필요한 물건을 사다 드리거나 가끔은 간식거리나 재롱을 부릴 강아지를 데리고 자주 방문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무엇인가 불편하셨는지 자꾸 그 사이에 나를 끼우려는 시도를 하셨다. 그 마음이 어떤지는 대충 나도 짐작을 하는 바가 있기에 못이기는 척 따라드렸다.

 

◈◈◈

 

할아버지가 그들을 불편해하는 이유는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만리타국에 사는 교류가 적은 손주, 그리고 딸들이 효도를 하는 동안 코빼기 한번 비추지 않고 자기들 사는데만 급급했던 아들의 일가.

 

사정이 어떻든간에 서운함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긴 시간동안 교류하지 못했던 공백을 파고든 것은 서운함만이 아닐테니 말이다. 실제로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살뜰히 보살핀 것은 두 딸들과 나, 그리고 그 사위들이었던 것이다. 아들이 해야할 몫을 나와 두분의 사위들이 대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긴 시간동안 할아버지의 쌈지에서 끊임없이 돈을 뽑아가고,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던 모습은 분명 할아버지에게도 뻔뻔함과 염치도 없는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쭉 옆에서 지켜보던 나조차도 효도와 돌봄, 모심이라는 조별과제의 불평등을 꿰뚫어 보고 있는데 당사자인 할아버지와 나와 함께 조별과제에 참가한 식구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그것을 옹호하는 이는 없었음이 그 증거이다.

 

그들의 뻔뻔함은 나의 사적인 감정을 제쳐두고라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20년이 넘는 시간, 돈과 시간 그리고 건강을 바쳐가며 부모를 살뜰히 모신것도 모자라 가족끼리 살던 집의 방을 내어드리고 언제든지 오실 수 있게 배려해드린 10년이 넘는 시간을 딸들은 불평 하나 없이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이라 여기고 정성껏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셨다.

 

할아버지께서 암에 걸려 투병을 해야했던 시간, 나의 엄마는 자신의 생명과 건강까지 깎아가며 할아버지의 꺼져가던 생명을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그로 인해 몇년 내내 엄마는 여전히 골골대고 있음에도 할아버지를 수발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엄마와 이모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것 저것 몸에 좋다는 음식을 할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불평 한마디 없이 사서 바치기 위해 지갑을 아낌없이 열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라 수시로 병원에 두분을 모시고 다니며 자신의 스케줄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나 역시 그 효도에 차출당해 원래 그 몫을 해야했을 두분의 아들을 대신해 동분서주(東奔西走)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두 딸과 사위들, 그리고 나의 수십년을 통째로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고, 그에 따라 할아버지는 나에게 영원히 가엾고 딱한 나의 할아버지에서 사리분별(事理分別)을 못 하고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은혜도 모르는 늙은이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유교문화권인 한국에서 손주 되는 입장의 사람이 연장자이자 조부를 향해 이토록 적나라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분명 터부(Taboo)시 될 일이나, 긴 시간 속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것이다.

 

◈◈◈

 

할아버지는 재산을 셋으로 나눠 자식들에게 나눠주었다. 겉으로 보면 평등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위에서 서술했듯이, 효도라는 조별과제에 참가한 조원과 그들의 기여도(寄與度)는 전혀 달랐다. 할아버지는 그 점을 철저히 무시하며 상속을 진행했던 것이다.

 

수십년의 시간을 부모를 위해 쓰고,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으며, 수시로 자신들의 집에 들락거리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것도 모자라 방까지 내어드린 두 딸들, 그리고 그들의 사위와 딸인 나의 시간과 노동력, 자원까지 넣어 효도를 하였음에도 말이다.

 

그에 비해 아들은 20년이 넘는 시간, 아니 이제 30년을 바라보는 긴 시간동안 그리 멀지도 않은 외국에 살며 형편이 어렵네, 자리를 못 잡았네 하는 다양한 이유로 찾아뵙기는 커녕 부모에게 용돈 한번을 보내지 않은것도 모자라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끔 전화 한번씩을 하는 정도로 생색을 냈던 것이다. 그런 아들과 딸들을 할아버지는 동일선상에 놓고 파이를 정확히 3등분해 나눠주며 자신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하는 좋은 부모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

 

진정 할아버지가 남녀차별 없이 자신에게 헌신한 두 딸들을 사랑했다면 딸들이 그동안 흘린 피, 땀, 눈물을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외면한게 아닐수도 있다. 그에게는 그저 그것이 당연하게 주어져 마땅했던 당연한 것들이였고, 멀리 사는 아들은 애틋하고 안타깝기만 한 아픈 손가락이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내가 엄마와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며 썼던 글이 있으니 그것을 참고로 마저 이어가도록 하겠다. 어쩌면 엄마도 이러한 대우를 당연히 받아왔으니 나에게도 똑같이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https://shearestis.tistory.com/120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독 인상깊게 기억이 나서 써보고자 한다. 엄마가 외출할 때 집에 물건을 하나 놓고온 일이 있었다. 사실 흔한 일이다. 그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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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긴 시간을 옆에서 그를 함께 모시며 집안 어른들의 헌신을 지켜보던 내게 완전히 신뢰와 존경을 잃었다. 나는 엄마와 이모가 겪은 부당함에 분노했고, 효(孝)라는 가치관 속에 평생을 살아온 둘과는 달리 그 분노를 터뜨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이 식었는지 알 수 있는 한가지 기준이 있다고 들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무엇을 먹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떻게 느껴지는지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상속결정을 들은 날 이후, 나는 식사때마다 안쓰럽고 말라서 무엇이라도 더 살이 찌고 건강해질만한 음식을 권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역겹게 느껴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가 치밀었다. 같이 식사를 하는것도 싫어졌다. 나는 어느순간부터 두분의 점심을 차려드릴지언정 함께 식사를 하지는 않게 되었다. 두분이 식사하는 동안 나는 묵묵히 쓰레기를 치우고 집안일을 하며 식탁을 떠나있다가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끝냈을지언정 식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노인에게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만, 그냥 같이 식사하는 것 자체가 안 되는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게 안 되는데. 억지로라도 넘길까 하면 그날은 위에 탈이 나서 약을 달고 살아야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노인에게 화풀이를 하고싶진 않으니 그건 그저 나의 최소한의 방어였던 것이다.

 

더이상 할아버지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예전과 같이 살갑게 굴지 않는 내가 아쉬웠는지 예전과 다르게 살살 나를 달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왜 예전과 다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그저 기계적으로 그분들의 효도 기계가 되었고 감정을 완전히 걷어내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할아버지는 예전과 다르게 그제서야 나를 어려워하며 내가 그에게 드리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눈치채는 듯 하였다. 하지만 이미 긴 시간 속에 부당함을 목격했음에도 사랑으로 그것을 이겨내온 내 한계는 터져버린 것 같았다. 예전과 같이 사랑은 더이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내가 느낄 수 있는것은 안쓰러움 정도였지, 전과 같은 감정은 더이상 들지 못했다. 누가 잘못한 것일까? 나? 아니면 할아버지?

 

상속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나의 무언가가 고장났다.

 

할아버지의 검진을 위해 따라간 병원의 대기실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낙서를 끄적이고, 스플래툰 매칭시간 고작 그 30초에서 1분밖에 되지 않는 사이에 짬짬이 그림을 그리고, 하루에도 몇장씩 아이디어가 떠올라 황급히 그림을 휘갈기던 나는 사라졌다.

 

나의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는 그 날, 그렇게 빛을 꺼뜨렸다.

프네우마를 잃은 나의 우시아(Ousia / οὐσία)를, 로고스(Logos / λόγος)가 홀로 남아 힘겹게 지탱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그림을 그릴 의욕도, 쉴새없이 머리를 스치는 발상도 모두 잃었다. 그렇게 그 날, 나의 프네우마는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

 

이야기가 길어졌으나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멀리서 찾아온 친척들은 분명 우리의 20년이 넘는 시간과 그에 들어간 자원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르면 그게 사람인가? 솔직히 지금도 그들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좀 어렵긴 하다만.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무엇 하나 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할아버지의 쌈지에서 끝없이 돈을 빼갔다고 했다. 그것이 나를 더 역겹고 화나게 만들었지만. 두 딸들 몰래 아들에게 퍼주고 있었던 할아버지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써먹었던 아들의 민낯이 그대로 까발려진 것이다.

 

이상하게도 상속을 기점(起點)으로 그들은 있는지도 몰랐던 염치(廉恥)도 없이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느날부터 1년에 못해도 1번은 한국에 나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 아들은 자신이 오지 못해도 한국에 ‘놀러’ 온 자신의 식구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가게 했다. 솔직히 좋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와서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두분의 건강을 염려하고 무엇인가를 자꾸 해드리고, 뭘 사서 안겨드리고자 했다. 그것은 강박과 같이 느껴졌고 그들의 부채(負債)를 상환(償還)하기 위한 몸부림으로만 보였다. 본인들의 변명을 들어보고 싶다만 내 등짝은 아직 소중하니 엄마 앞에서 면전에 물어보진 못했으니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딱 봐도 그렇게 보이는걸 어떻게 하겠나? 그에 대한 근거도 제시할 수 있다.

 

진심으로 그들이 미안함을 느끼고 염치가 있다면, 그래서 20년이 넘는 시간의 부채를 상환하고자 했다면 아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친척 어른이랍시고 나의 엄마와 이모가 주는 용돈을 한사코 거절해야 했다. 

단지 돈이 아까워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에요~.” 라고 하면서도 계속 손에 들려주는 용돈을 못 이기는 척 받아쳐먹는 모습에 대체 어디에서 진정성을 느끼라는 말인가? 계속해서 돈을 쥐어주어도 자신이 가진 부채감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 따라 돈을 받을 수 없음을 말하며 끝까지 그 돈을 거절했어야 했음에도 나의 사촌은 싸가지없이 그 돈을 매년 받아 쳐먹었던 것이다. 만약 이 글을 발견해 읽었고, 네가 억울해 미칠 것 같다면 직접 연락해 해명해도 좋다. 얼마든지 받아줄 의향이 있으니 말이다.

 

● 친척 어른이 계산하는 식사 자리에서 끝까지 네 지갑과 카드를 내밀며 거절했어야 했다.

위의 연장선이다. 그들이 뻔뻔하게 자신들의 삶을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효도를 하느라 고생한 친척들이 감히 그들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식사를 대접하게 만들어선 안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했어야할 몫까지 대신 효도한 이들을 위해 식사를 대접하는게 옳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번 주어진 식사를 쳐먹는것도 모자라 비싼 식사만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했어야할 의무에 대한 어떤 이해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심각한 강박적 행동이 관찰되어 나는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게 된 것이다. 

 

◈◈◈

 

위에서 이미 말했지만 사촌은 정말 과하다 싶을정도로 이번 방문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붙어 재잘대고 쉴새없이 무언가를 말하며 붙어있으려 했다. 할아버지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는 도망치듯 내게 오셔서는 “주인이 손님을 대접해야지.” 라며 나를 동석시켰다. 난 그들에게 딱히 할 말도, 궁금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눈앞에 놓인 과일이나 먹으며 시시한 이야기를 했으나 별로 기억나진 않는다. 딸기의 끝맛이 너무 셔서 눈이 X모양이 되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만.

 

개인적으로 외국에서 온 그들이 악인(惡人)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다만 그들은 멍청하다. 하지만 의도가 결과를 정당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멍청하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알맹이만을 날로 냉큼 먹어버린 적이 한두번도 아니고 말이다.

 

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끝없이 필요한 물건이 없냐고 물었다. 당연히 없겠지. 그런게 있다면 이미 우리가 전부 사드리거나 해결해 드렸으니까. 식사가 끝난 후 차 한잔을 마시러 외출한 카페에서도 그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사드리면 좋을까 하고 계속해서 고민하던 둘은 카페를 나서서 쇼핑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의 사촌은 한국의 세련된 물건들을 구경하기에 바빴고, 고른 옷을 피팅해보겠다며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나는 본의아니게 친척어른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정말 시시한 내용이기 그지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필요한 물건을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와 동시에 자기들은 해드린 게 없으니 뭐라도 사서 안겨드리고 싶다는 것이였다. 바보같은 발상이다.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은게 아니다. 그저 그들은 마음 속 부채감을 없애고 싶었던 것 뿐이다. 완벽한 악인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선인(善人)조차 되지 못하는 평범하기 그지 없던 그들은 나의 조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 선물을 사려고 한 것이다. 칸트가 들으면 정언명령으로 뚝배기를 깼을 것이다. 그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한 수단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선물을 하려고 했던것이지, 진정으로 그들을 염려하거나 미안하게 여긴 것이 아니다. 그에 더불어 그들은 이미 긴 시간동안을 효도로 증명해온 우리 식구들에게 어떤 생색을 내고싶었던 것이다. 나 역시 시간을 써서 그들을 방문했고 돈을 써서 무언가를 사서 선물해드렸으니 조별과제에 기여한 것이라며 상속에 대한 정당성을 어필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 속내를 새파랗게 어리고 나이도 한참 차이 나는 내게 들켰던 것이다.

 

그저 나는 그것을 악의로 받아칠 생각은 없었다. 사실을 명확히 했을 뿐. 나는 친척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필요한 것은 모두 그때그때 우리가 사드리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이는 예전 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들이자 내 엄마와 이모의 형제되는 자에게도 해줬던 말이다. 그가 홀로 조부모님을 뵈러 방문했을 때 나와 단 둘이 된 상황에서 나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잘 해드리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해 음료를 사서 전해드리기 위해 방문했었고, 그의 걱정에 따라 오늘과 같이 그때도 한결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모시겠다. 괜찮으니 안심해도 된다.”

 

딱히 꼽을 주려는 의도는 없었고, 오히려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으라는 내 나름의 진심을 담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 세간에서 말하는 ‘T스러운’ 사람이기에 그게 잘못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오늘 아들의 아내 되는 그는 미안해하며 그건 알고있지만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무엇이라도 하고싶다고 했다. 그러나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진짜 어떻게 추천할 것인가. 나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다르게 당신들은 외국에 긴 시간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옆에서 두분을 모시고 있으니 걱정할 이유가 없다. 부담을 가질 일도 아니다.”

 

그가 가진 부담이 가짜라 여겼기에 나는 그들이 부담을 갖지 않기를 바랬다. 단지 그뿐, 악의는 하나도 없었기에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부담은 비효율적이기만 할 뿐이므로. 차라리 예전처럼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르는게 더 나을 수도 있고 말이다. 결국 그들은 쇼핑 중에 아무것도 선물할 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엄마의 추천에 따라 할아버지가 종종 찾으시는 맛집의 음식을 대신 계산해 포장해 드리는 것으로 자기 스스로와 합의를 본 듯 했다.

 

◈◈◈

 

엄마는 예전부터 이 상속 사건으로 나와 수없이 싸웠다. 싸웠다는 말은 좀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일방적으로 엄마가 내게 화를 냈을 뿐이니까.

 

나는 할아버지가 엄마와 이모에게 부당하게 대했음을 명확히 했다. 그에 따라 나는 더이상 존중받지 못한 일방적인 착취를 당할 이유가 없으니 나는 이 조별과제에서 빠지겠다며 불효를 선언했고, 엄마는 울고불고 화를 냈다.

 

고작 돈 때문에 그러느냐, 대체 뭐가 문제냐, 너는 정말 사갈(蛇蝎)과도 같은 존재다 라는 식의 폭언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의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 다시 지극한 효손녀(孝孫女)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 폭언에 따라 점점 차가워졌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쏟아졌다. 엄마의 폭력이 나를 타고 그들에게 전이된 것이다.

 

“뭔가를 열심히 한 사람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똑같은 대가를 받는다면, 그건 열심히 한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받은게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엄마의 면전에 나의 논리를 내세워 철벽으로 방어를 했다. 엄마는 이 방패를 뚫을 창을 끝끝내 만들어내지 못했고, 그에 따라 나같은거 없이도 혼자 할 수 있다며 허세를 부렸다. 나는 강 건너에서 불을 구경하며 그토록 헌신한 대가를 헌신짝으로 돌려받은 엄마를 관찰했다. 엄마는 곧 병이 나 몸져 누웠고, 그에 따라 백기를 들고 내게 투항했다. 결국 아쉬운건 엄마였던 것이다. 엄마는 두분에게 일체 발길을 끊은 내게 살살대며 한번만 도와달라, 이번만 도와달라 아쉬운 소리를 냈고, 나 역시 엄마를 향해 가혹하게 대할 의도는 없었기에 알려줘도 듣지 않았던 교훈을 스스로의 몸으로서 체득해낸 엄마를 가엾게 여겨 그 요구를 들어주었을 뿐이다.

 

다시 발길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주변 식구들도 이제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나와 엄마의 신경전 속에 다들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각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과 태도를 취했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그저 착취당하던 이전과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

 

그저 돈이 아쉬워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가?

그까짓 돈 몇 푼 못 받은게 화가 나서 이렇게까지 가족 사이에 분란을 만들었는가?

그게 뭐라고 다 늙은 조부모를 천대하는 불효(不孝)를 저질렀나?

 

나 스스로를 변명해보자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나도 그까짓 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치졸하게 굴고 있는가 고민했으나, 스스로 긴 시간을 자신을 들여다본 결과, 그것은 정답이 아니였다.

 

나는 공정함이라는 가치를 훼손당한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하찮게 다룬 이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또한 정당하지 못한 대가를 감히 도둑질한 뻔뻔한 이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외국에 오랫동안 거주하며 돈만 날름 삼킨것도 모자라 수시로 늙은 할아버지의 쌈짓돈을 알음알음 빼먹으며 자기들 유흥에 써먹은 이들은 나의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 인면수심(人面獸心), 후안무치(厚顔無恥)를 알고서도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헌신한 이들과 나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모욕(侮辱)하는 일이다.

 

또한 그들이 이제와서 뒤늦게 받아 쳐먹은 것에 대해 부랴부랴 벼락치기를 하듯 살면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수명을 앞두고 조별과제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행위는 졸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이제껏 했던것처럼 멍청하고 아둔하게 구는 것이 덜 모욕적이다. 여태껏 받아온 알음알음한 것에는 눈치채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상속이라는 커다란 결과를 받아들고 나니까 하는 척이라도 해서 나중에 있을 뒷감당을 봉쇄하려는 모습이 구역질이 난다. 혹시라도 연이 끊길까 두려운 마음에 이제서라도 벌어진 감정과 사이를 봉합하려는 것이라면 참으로 염치없기 짝이 없다. 차라리 이제와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서운함을 지우려 두분의 여생을 뒤흔들지나 말 것이지.

 

◈◈◈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진심을 알고싶다면 그의 입이 아니라 선택을 보면 된다고 하였다. 입은 쉽게 거짓을 내뱉고 상대를 기만할 수 있으나, 결국 그의 욕망이 그를 진실로 이끌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거짓으로 상대를 속여 사기를 칠 수는 있어도, 결국 그가 택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진실된 것이기에.

 

진정 그들이 미안함을 느꼈다면, 염치가 있었다면, 죄책감을 느꼈다면, 야금야금 받아간 할아버지의 쌈짓돈에 대해 그때마다 무언가 제스처를 취했어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재물을 기뻐하며 그것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충족시키는데 바빠 그 쌈지가 누구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감사히 여기는 마음조차 없었다.

 

그들이 정말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그들은 할아버지가 잘못된 선택으로 나눠준 상속을 거절하며 자신의 몫을 하지 못했음을 사죄해야 했다. 그와 동시에 그 돈을 돌려주며 여생을 즐겁게 보내시길 간절히 권하거나 자신을 대신해 자신의 몫을 짊어졌던 두 누이들에게 나눠주길 청해야 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냉큼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집어들고 품에 챙겨넣었다.

 

나의 사촌은 조부모에게 줄 선물을 골라야 한다고 커피를 입에 넣으면서도 재잘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쇼핑몰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옷가게로 향했다. 자신이 갖고싶었다는 옷을 골라집고 즐거워하며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선물을 고르러 가지 않았다. 그의 욕망인 예쁜 옷을 먼저 선택했다. 모든 쇼핑이 끝난 뒤 그는 비로소 조부모에게 드릴 선물을 고르겠다며 가게를 두리번거렸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가 진심이였다면 먼저 선물을 고르러 향했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대신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외국에서 나오기 전에 뭐라도 골라서 손에 들고 왔을 것이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게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뱉는 대신에 말이다. 한국에 있어서 못 사오는게 아니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있는걸 알고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사서 오는 선물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진정 모르는 것인가? 그게 아니더라도 고생했던 두 누이를 위해 아내와 자식의 손에 뭐라도 쥐어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 누이들의 시간과 돈을 축내는 것을 택했고, 늙은 부모의 가슴에 돌을 얹는 것을 택했다.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선택은 진실을 집어들었다.

 

◈◈◈

 

그들은 물에 물을 탄 듯, 술에 술을 탄 듯 한 삶을 살았다. 스스로 투쟁하여 자신을 지키려 하지도 않았음에도 선한 가면을 쓰고 그것을 합리화하며 약자로서의 포지션을 알뜰히도 이용해 먹었다. 그들은 선하지 않다. 그들이 가져온 결과, 그들이 가져간 결과물은 선한 의도조차 없었다. 그저 주면 주는대로 받고, 받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결과는 분명 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생각한다. 생각 없이 남이 이끄는대로 살아가며 안주하는 것은 선함도 평범함도 아니다. 어쩌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오늘도 무엇을 하며 내일을 보낼지 바다에 떠있는 해파리처럼 맹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발상이지만, 외국에서 건너온 친척들의 모습은 마치 ‘정치적 올바름’ 이라는 표어를 들고 좋아보이는 말을 내뱉으며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문명을 붕괴시키기만 하는 이들과 몹시 닮아있다. 그들의 유사성에 대해서 설명하기 귀찮으니 이전에 쓴 글을 살짝 던져놓겠다. 어린아이라도 이 둘의 구조가 같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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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까지는 세상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그 시절에는 비록 부족하고, 없고, 많이 미숙하고 곤란한 시대였지만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 내 이웃과 친구, 동료와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이 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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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참 듣기 좋은 말이 많다. “너는 소중해”, “네 기분이 곧 법이다” 와 같이 인간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삭제한 채 감성(Pathos,πάθος) 만을 자극하는 비논리적인 포장지로 둘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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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καλοκαγαθία)그리스어(헬라어)로 아름다움(Kalon, καλός)과 선함, 탁월함(Agathon, ἀγαθός)를 합쳐 만든 단어로, 육체적 아름다움(외면)과 정신적 덕(내면)이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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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가면을 쓴 찬탈자

야생에서 약한 개체는 도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이지는 않다.가장 약한 인간은 지능 스탯에 모든 포인트를 올인(All in)했고, 지구의 지배종으로 거듭났다. 인간은 약한 자를 내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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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훗날 천수를 다해 영면에 드시는 순간, 임종조차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럴 여건도 의지도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뒤늦게 마련된 빈소에 찾아와 영정사진 앞에 무릎을 꿇고 뒤늦은 눈물을 쏟으며 오열할지도 모르겠다.

 

긴 간병과 돌봄을 경험한 이들은 오히려 고인의 죽음 앞에 평온하기도 하다고 들었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 두분을 미워해서 그들의 죽음이 기쁘다 여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후회 없이 모시고 보살펴드렸으며 그들의 부당한 대우에도 헌신했던 긴 시간들이 나를 평온하게 만들 것이라 상상해본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설령 누군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온하대도 그 누구도 손가락질 할 자격은 없을 것이다. 후회의 눈물은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 아쉬움이 남았을 때에 나오는 법이다. 그들이 마지막 순간 뒤늦게 흘릴 눈물에 무엇이 담겨있을지는 그때 가서 알 일이다. 아직 그들에게는 모든 잘못과 실수를 바로잡을 짧지만 아직 남아있는 시간이 있으니 말이다. 기회는 충분히 주어졌고, 여전히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기회를 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알까? 그가 살갑게 군답시고 붙잡고 있는 할아버지의 손이 차갑게 굳어있는 것을? 말 몇마디 붙이며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며 노인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그 뒤에는 과일을 깎아내고 식기를 설거지하는 두 딸과 손주가 있음을? 그가 칭찬한 할아버지의 따뜻한 김장조끼는 그 두 딸이 추운 겨울 감기에 걸리지 말고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골라 온,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색을 한 옷이라는 것을? 

 

SNL의 유명한 연예인 이수지 씨의 개그연기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이모와 고모의 차이> 라면서 보여준 유튜브 속 쇼츠 영상 속에는 사근사근한 이모의 다정한 대사에 이어, 고모의 대사랍시고 이수지 씨가 열연했던 대사가 있다.

 

“오빠는 그러면 안된다, 오빠는!”

 

아마 모를 것이다. 알려고 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지혜도, 심성도 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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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없게 숟가락을 얹는 자에게: 고라니 목장

오랜만에 해외에 사는 친척이 한국을 방문했다. 적어도 한달 전에는 온다고 말해줄 것이지, 내가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바로 어제였다. 하다못해 내가 오늘 다른 스케줄을 미리 잡고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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