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털이 너무 많이 자랐다. 눈썹마저 길게 자라 꼭 호호 할아버지처럼 축 쳐지고 마치 테디베어처럼 보이게 되었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길 이 때가 제일 귀엽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이는 곧 우리 강아지의 미용 시기가 다가온 것을 알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풍성하고 복슬복슬한 백금색과 은빛으로 반짝이는 털이 햇볕을 받고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전부 지금 이 순간 이곳에 모두 모여 실체화한 것이 분명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그러나, 보기 좋은 모습에도 털을 깎아야한다. 우리 강아지는 본디 피부가 약해 트러블이 많이 나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빗을 들고 책장을 넘기듯이 털 사이사이를 살펴가며 딱지를 떼고 짓무른 피부에 약을 발라줘야 하기 때문이다.
강아지는 종종 가려움에 괴로워 몸을 심하게 핥고 빨아대며 견디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 눈에 예쁘자고 털을 길러줄 수는 없었다. 강아지도 자신의 길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털에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털을 잘라야했다. 우리는 모두 강아지에게 털이 있던 없던 세상에서 최고로 귀여운 우리집 막내 사랑둥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강아지에게는 참으로 서운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항상 미용이 끝나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뽀뽀와 함께 예쁘다고 쉴새없이 칭찬을 퍼부어가며 간식을 조공해 시무룩해졌을 강아지를 위로하고 지쳐 잠들때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내어주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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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병원이 있는 상가는 꽤 크고 넓은 건물이다. 냉방과 난방 효율을 위해 문은 이중 구조로 되어있는데, 이로 인해 종종 곤란에 처한 아기 엄마들을 발견하고는 한다.
어쩜 그렇게 솜씨가 좋은지 유모차를 뒤로 돌린 채 자신의 등으로 유리문을 밀고 유모차를 마저 문 반대편으로 빼내는 모습에서 프로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모두들 다른 문이면 몰라도 이중으로 된 문의 구조상 나머지 하나의 문을 열어야하는 곤란함에 처하기 마련이고, 그 모습을 발견하면 나는 항상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고 잡아주겠다는 제안을 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그 아기 엄마들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내비치며 유모차와 함께 문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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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동시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아는 이 역시 나처럼 한 아이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가는 것을 발견하고 호의를 베풀어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 아이 엄마는 위에서 말한 사람과 다르게 감사하다는 말은 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쌩 하니 유모차를 밀고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올리고 가버린 것이다. 소위 말하는 ‘애 낳은게 벼슬’인 사람 그 자체였다.
호의를 베푼 이는 무엇을 바라고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다. 금전을 요구하려 한 것도 아니고, 그 아이 엄마에게 무언가 바라는 마음을 품은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은 상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본디 순환하기 마련이기에, 베푼 호의가 무시에 의해 꺾이고 좌절되면 순환이 끊긴다. 그는 그 이후 마음이 상해 굳이 요청을 받는게 아닌 이상 뛰어가서 유모차를 밀고 있는 엄마들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호의를 베풀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절대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단지 친절을 베푸는 선택 속에 좋지 못한 피드백을 경험했을 뿐이고, 그는 감정적인 소모를 막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니 말이다.
애 낳은게 벼슬이였던 그 아이 엄마는 위에서 말한 이와 다른 선택을 했다. 타인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매너와 예의 없이 행동하였기에 그는 사회의 상호신뢰(相互信賴)를 깎아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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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Manners)와 예의(Etiquette). 매너는 행동(行動, Action)이자 방법(方法, How)이며, 예의는 마음이자 태도(態度, Why)다. 더 쉽게 말하자면 매너는 인터페이스이자 (UI) 및 출력값에 해당하며, (Output) 예의는 OS(Operating System)에 해당한다. 또한 매너는 형이하학(形而下學, Physics)적인 것이며 예의는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트리니티 시스템 가설에 따라 표현하자면 예의는 마음가짐이기에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에 해당하며, 매너는 예의라는 에너지가 발현되기 위한 설계도이기에 로고스(Logos / λόγος)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예의를 갖추고 매너를 지키는 ‘나’의 격(格, Class) 혹은 기품(氣品)인데 이것이 우시아(Ousia / οὐσία)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격과 기품은 내면에 존재하나 외부의 타자(他者)가 관측할 수 있으므로 이는 형이하학임과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중첩적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배려라는 온토스(Ontos / Ὄντος)로서 3차원 물질계에 발현된다.
◆ 진리 탐구 메모 https://shearestis.tistory.com/98
진리 탐구 메모
트리니티 시스템 (The Trinity System: Providence)이건 어릴적부터 내가 감으로 느껴오던 것을 2025년 12월 4째주 일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누워있다가 할 일이 없어서 대충 끄적여 언어화한 낙서임.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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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결코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많은 고등동물과 사회적인 동물들, 지성체는 어떤 형태로던 자기들이 만든 사회와 문화 속 반드시 매너와 예의라는 기본적인 골조를 만들고 그를 통해 분쟁을 피하고 조화와 평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어린 아이가 가정에서 아빠와 엄마의 손에 의해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배우고 사회로 나와 공동 생활을 하며 매너를 익힌다. 이것은 반드시 탑재되어 할 사회적 동물로서의 기본인 것임에도 이것을 제대로 배우고 나오지 않은 이들이 사회의 상호신뢰라는 돈으로도 절대 살 수 없는 중요한 자산을 깎아먹기도 한다.
그렇다면 상호신뢰는 무엇이기에 돈으로도 살 수 없다고 말했는가 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누군가와 경쟁을 한다. 서식지를 얻고 지키기 위해 경쟁하고, 먹이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나의 서열을 높히기 위해 경쟁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공정하고 품격있는 경쟁이 이뤄진다면 참 좋겠으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 그렇게 깨끗하지만은 않다. 가끔은 룰 브레이커(Rule Breaker)가 나타나 규칙을 깨고 반칙을 저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칙을 하는 자(者)가 이득을 얻고 규칙을 깬 것에 대한 패널티(Penalty)를 받지 않는것을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규칙을 지키면 손해를 본다.”
이 작은 균열이 질서(秩序, Order)와 절제(節制, Temperance) 속에서 세워진 기둥을 부수는 전초현상이다. 어떤 이는 반칙을 저지른 자를 따라 함께 룰을 깰 것이며, 그런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규칙을 지키는 것에 대해 허탈함을 느끼고 의욕을 잃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의 가치를 상실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며, 그에 따라 사회는 자유가 아닌 방종 위에서 나 하나만 잘 되면 된다고 개인주의에 빠져 서서히 붕괴하게 된다.
열심히 노력한 자, 자신을 절제한 자, 질서를 지킨 자가 손해를 보고 노력하지 않은 자, 방종하게 구는 자, 질서를 훼손한 자가 이득을 보는 엽기적인 세상 속에서 대체 어떻게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국가가 존립(存立)할 수 있으며 문명이 존속(存續)될 수 있겠나?
상호신뢰는 내가 베푼 친절, 호의가 나에게 해로운 결과를 불러왔을 때에도 무너진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있다. 이는 괴담을 통해서 널리 퍼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할머니가 학생에게 길을 물어본다. 그 학생은 매너와 예의를 갖추고, 약자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규칙을 바탕으로 길을 묻는 할머니에게 호의를 베푼다. 그리고 학생이 긴장을 풀었을 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검은 봉고차가 달려와 문을 열고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납치범이 학생을 차 안으로 끌고 들어가 납치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그저 괴담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생긴 실종아동은 여전히 사라진 그 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광고지와 신문 끄트머리에 실려 몇십년이고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요즘 세상에서는 누가 아이에게 도움을 청하여도 절대 도와주지 말고 무시하고 도망쳐야 한다고 가르치는 분위기가 정착하였고,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상호신뢰의 문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버전도 있다. 심야의 버스에서 할머니와 한 여자만 타고 있었다. 할머니가 일어나서 갑자기 여자에게 시비를 걸며 자리를 비키라고 했고, 왜 자리가 많은데도 비키라고 하는 것이냐며 싸움이 났다. 할머니는 내려서 싸우자고 씩씩대며 하차했고, 여자가 따라서 내리려 하자 버스 기사가 갑자기 뒷문을 닫고 출발해버렸다. 내리지 못한 여자가 항의하자 버스 기사가 말하기를, “버스 뒤에 검은색 봉고차가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버스 기사는 이미 그 할머니가 납치범인 것을 알고 조용히 여자를 구해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상호신뢰를 깨부순 사건을 보여준다.
상호신뢰가 무너지면 사회를 유지하는 법과 규칙이 무너진다. 내 옆의 이웃이 나의 것을 탐해 나를 찌르지 않을 것이고, 내가 가진 것을 남이 갈취하려 했을 때 보호받고 나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음을 알기에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경계를 내려놓고 다함께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상호신뢰가 무너져 타인을 끝없이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세상이 된다면 사람들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쏟을 에너지를 남을 의심하고 경계하는데 써야한다. 그렇기에 상호신뢰는 사회를 받드는 기둥 그 자체이며, 이것을 훼손하는 것은 곧 사회를 흔드는 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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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상호신뢰를 깎아먹는 일은 현대 21세기에 들어서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사회현상과 갈등 속에서 우리는 이에 대한 데이터를 충분히 차고 넘치게 관찰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정리한 글들을 참고해서 다음으로 이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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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에 종종 나오는 비혼모가 있다.정자 기증을 통해 낳은 아이를 데리고 육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데, 아이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엄마의 뱃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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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의 가치를 왜곡하는 질투 https://shearestis.tistory.com/126
평등의 가치를 왜곡하는 질투
세상에는 다양한 재능이 있다. 누군가는 글을 잘 쓰고,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리며, 누군가는 머리가 뛰어나고, 누군가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뛰어나며, 누군가는 음악에 재능을 갖고 있다.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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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καλοκαγαθία)그리스어(헬라어)로 아름다움(Kalon, καλός)과 선함, 탁월함(Agathon, ἀγαθός)를 합쳐 만든 단어로, 육체적 아름다움(외면)과 정신적 덕(내면)이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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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빵에는 죄가 없다
SNS상에서 어떤 사람이 사이버불링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논란이 되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SNS에 게시했다는 이유만으로, 글의 게시자는 그들의 선전용(宣傳, Propaganda) 우상(偶像, Idol)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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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가면을 쓴 찬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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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심연은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34
결국 심연은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오늘도 즐겁게 새로운 게임 정보가 있나 공식 계정을 보기 위해 SNS에 로그인을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의 특이한 친구는 몇년 전 어느 순간부터 정치활동과 인권운동 등에 푹 빠져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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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없게 숟가락을 얹는 자에게
※ 불꽃 K장녀가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사연 오랜만에 해외에 사는 친척이 한국을 방문했다. 적어도 한달 전에는 온다고 말해줄 것이지, 내가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바로 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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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에게 영감을 주는 친구가 있다. 한 명은 아니고 여럿인데 그 중 하나이다. 그 친구를 만난 것은 몇개월 전이였는데, 딱히 만나지 않아도 SNS를 통해 그가 살아있다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그러니 오랜만에 만났다 해도 그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그와 지금의 그는 확연히 달랐고,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사상에 푹 빠져 마치 문화대혁명 속 홍위병처럼 그 사상의 부역자이자 앞잡이가 되어 무급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하다못해 그가 들고있는 누더기 깃발의 주인이라도 된다면 모르겠으나, 그는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듯 했다.
그와 차를 마시며 지나가듯 생각이 나 감사를 표한 적이 있다. 나는 절대 적대적인 의도를 갖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그는 SNS상에 항상 극단적인 사상의 글을 RT(리트윗, Retweet)하거나 인용 기능을 이용해 자신의 비공개 계정으로 비문(非文)에 가까운 감정적인 배설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가 가져온 원 게시물의 내용은 하나같이 모순으로 가득한 궤변에 불과했으며, 그는 자신의 사상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이에게는 들리지 않게 비공개된 계정을 이용해 인용으로 욕설을 퍼붓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나는 내 친구 자체에는 딱히 불만이 없었으나 그의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모습에는 항상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고, 그가 주장하는 사상을 검토해본 결과 그것은 모순이자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였다. 이에 따라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가 리트윗하고 인용해서 가져오는 계정들만 블락해도 타임라인(TL)이 깨끗해져서 좋다. 고마워.”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며 귀를 열어두었다. 극단적인 사상에 심취한 이를 교정하려 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미 눈과 귀를 막고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닫아둔 이를 설득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그가 그토록 격렬하게 주장하는 사상이 무엇인지 그의 입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고 그가 모순을 어떻게 논리로 바꿀 것인지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놀라우리만치 처참했다.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닫았다. 어깨를 움추리고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닌 그저 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음…” 이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하였고, 나는 곧 흥미를 잃고 그것이 시시하다 여겨 차를 마저 즐겼던 것이다. 이후에는 시시한 일상과 근황의 이야기만이 이어졌기에 크게 기억나는 것은 없다. 다만 나는 그저 그의 진심이 궁금했을 뿐이고, 그가 텅 비어있는 껍데기이자 누군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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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욕을 하자고 위 에피소드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 이 친구가 오늘도 SNS에 이상한 단어를 썼기에 그저 친구에 대한 사전정보를 입력한 것 뿐이다. 그는 참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신기한 단어들을 자주 들고온다. 아마 어울리는 이들끼리 쓰는 은어(隱語)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컨프(Control Freak)와 젠더 감수성이라는 단어였다. 둘 다 나에게는 생소하였으나, 21세기는 인터넷 시대인 것이다. 손가락 한번 움직이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손에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사는 만큼 나는 검색 엔진에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았던 것이다.
컨프는 컨트롤 프릭의 줄임말이였다. 모든 상황과 주변 사람을 자신의 기준대로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데, 좀 더 쉽게 말하자면 통제광(統制狂)을 말하는게 아닐까 한다. 정말 별걸 다 줄인다. 참고로 별걸 다 줄인다는 말의 줄임말은 별다줄이다.
젠더 감수성이라는 말은 위에서 참고하라고 한 문서 속 사상에서 나온 파생어이자 라벨(Label)이다. 이것은 ‘상대방이 성별과 관련해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미리 짐작하고 배려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생물학적 사실(Fact)보다 상대의 기분(Feeling)을 우선하는 가치관을 의미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 단어의 풀이를 조사해보니 의문이 들었다. 위에서 유모차와 아기엄마, 그리고 문을 열어주었을 때 각자의 반응을 서술한 데이터, 매너와 예의에 대한 뜻풀이는 이 단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사전적 지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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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은 예의에서 나오는 매너가 기품있게 발현되는 현상이다. 이에 따라 나는 젠더 감수성이라는 단어를 철저하게 해부해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젠더 감수성이라는 것은 배려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억압과 규제, 통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젠더 감수성에 대해 위에서 설명하였듯 상대방이 성별과 관련해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미리 짐작해서 배려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배려라는 것은 성별에 관계없이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내가 존중받아야할 가치만큼, 내가 존중할 수 있는 능력과 범위에 따라 평등하게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말재주가 없으니 예시를 몇개 들어서 이를 설명해보려 한다.
● 여자라서 문을 잡아주고, 남자라서 문을 잡아주지 않는 것은 배려가 아니다. 내 뒤를 따라 문을 통과하려는 이를 위해 잠시 문을 잡고 그가 문을 잡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은 성별을 떠나 필요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 근무복을 지급하기 위해 상대의 신체 사이즈를 물어보는 것은 배려이지, 성추행이 아니다. 오히려 대충 근무복을 지급해서 지급받은 이가 입을 수 없거나 사이즈가 맞지 않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매너가 없는 행동이 된다.
● 짐을 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노인을 도와 짐을 들어주는 것은 배려에 해당한다. 그와 동시에 같은 무게의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건장한 남자를 도와주지 않는 것은 배려가 아닌 것이 아니다. 같은 무게의 짐이라도 노인에게는 무거울 수 있으나, 건장한 남자는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문제없이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다리를 다쳐 계단을 오를 수 없는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유모차를 보고 내리지 않는 것이 배려가 아닌 것이 아니다. 이는 이미 엘리베이터에 탄 이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있기에, 자신이 배려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상황이므로 그는 배려를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 맞다. 또한 엘리베이터에서 그가 내리지 않는다고 하여 유모차를 탄 이가 배려를 강요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이다.
● 특정한 인칭대명사로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배려받지 못했다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 어긋난다. 인칭대명사는 절대적인 상수(특히 생물학적) 속에서 정해지는 것이며 기분에 따라 정해질 수 없다. 누군가의 마음을 미륵불처럼 관심술을 써서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근거로 타인을 지칭하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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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예시를 근거로 쉽게 알 수 있다. 젠더 감수성이라는 것은 배려라는 시스템의 로고스를 비틀어 온토스를 왜곡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려는 강요되는 순간 결코 배려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젠더 감수성의 구동에는 프네우마가 빠져있다. 단지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의 기분과 상태를 눈치보듯 체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애초부터 프네우마가 빠진 채로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남의 눈치를 살피며 위축되면 자연스럽게 격이 손상된다. 이 과정에서 우시아가 손상된다.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와 진리, 자기판단이 결여된 채 누군가 억지로 만들어낸 도그마(Dogma)를 외워서 그저 모방해야 하는 매너는 자신의 로고스로서 굴러가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로고스 역시 손상되고, 이것이 이어지면 결국 파괴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젠더 감수성은 배려를 만들지 못하고 그저 사상 속에 갇혀 남의 눈치를 보며 내가 죄인 혹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보겠다.
잘못된 사상이 빚어낸 도그마라는 오류 속에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나’라는 주체가 아닌 도그마의 오류 속에서 자기판단을 배제하고 남이 정해준 공식을 암기해서 나온 틀에 박힌 오답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프네우마의 부재(不在)를 뜻한다.
남이 정해준 공식을 암기하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를 지우고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외부에게 의탁하는 행위가 된다. 그로 인해 남의 눈치를 보고 외부의 잣대에 의해 자기검열을 하는 과정에서 ‘나’ 라는 인격과 그가 지닌 기품이 손상된다. 이것이 우시아의 손상을 의미한다.
정해준 공식이 도출해낸 답을 외워 자신의 논리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그저 순종하고 굴복해 원리도 모른 채 남에게서 빌려온 답으로서 매너를 출력하는 것은 로고스의 손상 혹은 부재를 나타낸다.
그렇기에 프네우마가 없고 우시아가 손상되며 로고스가 망가지거나 사라진 자리에 온토스가 발현될 수 없다. 이것이 젠더 감수성에는 배려가 성립하지 못하는 증명이 되는 것이다.
젠더 감수성은 배려하는 이의 자발적인 마음이 아니라, 배려받고자 하는 이의 상대방에 대한 억압과 협박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너지의 방향성이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리하여 젠더 감수성은 타인의 프네우마라는 정신을 갈취하는 폭력이자, 타인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을 수 있다는 압박을 가함과 동시에 가해자의 프레임을 씌워 그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시작하여 격을 깎아 우시아를 손상시키는 협박이자, 나를 대함에 있어 내가 정한 방식으로 나를 대우하고 배려하기를 강요해 로고스를 마비시키는 강요에 지나지 않는다.
배려를 요청하는 이가 상대를 억압하고 협박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타인에게 먼저 낙인을 찍고 시작함과 동시에 그를 죄인으로 만들어 평등해야 할 입장을 대등하지 못한 것으로 만들고 피해자의 탈을 쓴 권력자로서 대접받겠다는 태도와 나를 대접해야 할 의전목록을 상대에게 지급하고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자가 대체 무슨 근거와 자격으로 남에게 배려를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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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인들이 나누던 대화가 기억난다. 대화를 주도하는 그는 마침 갓 아이를 낳았고,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적인 그의 성향에 따라 아이를 낳은 스스로에게 푹 취해있었던 모양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이를 낳은 자신은 애국자이며 무언가 큰 업적을 달성한 남과 다른 존재라고 여겼는지 한번은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 표현이 과하다느니 모성혐오라느니 하는 식의 오해를 살 수도 있다만 다음에 서술할 에피소드를 듣고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이 유모차의 무게를 두고 푸념했다. 여자가 들기는 너무 무겁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지하철의 엘리베이터는 유모차를 위해 설치된 것이라 주장했다. 물론 노약자를 위해 설치된 것이니 당연히 그도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떡하니 보고도 엘리베이터의 줄을 양보하거나 내려서 대신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배려는 지능이죠^^!” 라고 쏘아붙였는데, 그냥 대화를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큰 모순을 느꼈다.
그가 주장한 배려는 자신이 받고싶은 배려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배려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자신도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 젊고 멀쩡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간과한 것이 있다. 그들 중에는 다리를 다치거나 허리디스크 등으로 인해 수술을 받아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든 이가 있을 수도 있으며, 그날따라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계단을 오르는 것이 무리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입으로 내지 않고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 각자의 사정이 저마다 있을 것인데도 그는 그저 자신이 배려받지 못하는 상황만을 인식하고 타인을 배려할 지능이 없는 자로 깎아내렸다.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사고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진정 그가 배려를 지능이라 주장하고 싶었다면, 그가 먼저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지능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참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통해 타인에게 배려하지 못하는 지능을 지닌 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몸소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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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는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배려받은 타인 또한 나를 배려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배려한 자로서의 ‘나’의 품격과 예의 그리고 매너는 결코 손상되지 않는 가치가 된다. 내가 먼저 배려를 받는다 해도 이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기분에 따라 흔들리는 변수에 따라 세상을 대하고 나를 대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곧 사회의 상호신뢰라는 자산을 깎아먹는 암세포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있으며,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것을 규범이나 규칙, 크게는 법으로 정해 지켜왔다. 하다못해 동물들 사이에도 자기들만의 규칙과 매너가 존재한다.
예를들어 뒤집어진 거북이를 발견하면 모든 거북이들이 너도 나도 몰려가 그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게 밀어준다. 이는 내가 뒤집어졌을 때 남이 나를 뒤집어줄 것을 기대하며 나 역시 뒤집어진 남을 돕겠다는 상호 신뢰에서 비롯된 그들만의 규칙인 것이다.
배설행위를 하는 동료를 따라 그를 등지고 경계를 서주는 많은 동물들 역시 그러하다. 가장 방어가 취약한 순간에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니 너 역시 나를 지켜주길 바라는 상호 신뢰가 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놀랍게도 이종간인 인간과 강아지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일인데, 인간이 화장실에 가면 곤히 자다가도 급히 일어나서 따라와서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 인간이 나올때까지 화장실을 등지고 그를 지켜주려 하는 것이다.
펭귄 유치원이라는 것이 있다. 아기 펭귄들이 부모 펭귄을 기다리며 자기들끼리 남극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동그랗게 한데 모여 뭉쳐서 체온을 나누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안쪽에 들어간 펭귄만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들은 영리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밖과 안의 위치를 교대하며 따뜻함을 평등하게 누린다. 그것은 내가 계속해서 안을 차지하고 너만 차가운 바람을 맞게 하지 않을테니 너도 나를 계속해서 바깥에 세워두진 말아달라는 상호 신뢰를 나타내는 모습이다.
그러나 젠더 감수성이라는 라벨을 들고 온 이들은 어찌보면 동물들보다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표현이 너무 세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진짜 그렇게 느낀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지인도 그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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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링과 언어의 오염이 이토록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풀어서 해체해 나열해보면 그저 저열한 억지와 땡깡에 지나지 않는 이기적인 본심을 그럴싸한 단어 속에 숨겨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는 것 조차 죄악이 되도록 포장지로 화려하게 감싸는 것은 결코 선함이 아닐 것이다. 그저 결함을 감추기에 급급한 위선자들이 스스로의 추악함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위선도 선이라는 말이 있다. 결과가 좋다면 의도야 어찌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물론, 의도가 좋았다 하더라도 결과가 잘못된 것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잘못된 의도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적인 선은 언젠가 한계를 불러오게 된다. 설계도부터 잘못된 건물이 어떻게 안전하게 지어질 수 있고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단 말인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는 있으나, 언젠가 반드시 그 속에 들어갔어야 하는 빼돌린 자재와 구조적 결함에 의해 무너지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절대적인 상수와 가변성을 갖는 변수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로 인해 사회의 상호 신뢰 자산이 붕괴한다면 결국 젠더 감수성이니 뭐니 하는 것을 핑계로 자신의 결함을 가리고자 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붕괴한 돌과 잔해에 깔려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글에서도 한 말이지만 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으며, 가치는 합의로 인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의와 매너 그리고 배려: 고라니 목장
강아지 털이 너무 많이 자랐다. 눈썹마저 길게 자라 꼭 호호 할아버지처럼 축 쳐지고 마치 테디베어처럼 보이게 되었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길 이 때가 제일 귀엽다고 한다. 그와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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