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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καλοκαγαθία)

그리스어(헬라어)로 아름다움(Kalon, καλός)과 선함, 탁월함(Agathon, ἀγαθός)를 합쳐 만든 단어로, 육체적 아름다움(외면)과 정신적 덕(내면)이 조화를 이룬 완벽한 인간상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아름다운 몸에 비로소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은 육체와 영혼이 조화롭게 중용(메소테스, Mesotes, Mesotesμεσότης)을 이루는 모습이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하였다.

 

나 역시 동의한다. 건강한 몸이 있어야 비로소 건강한 정신이 깃들 수 있고, 아름답고 청명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완전무결한 그릇이 있어야 그것이 제 가치를 발휘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이 고귀한 가치를 두고 차별적이라는 라벨(Label)을 붙여 깎아내리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결함을 두고 그것을 연민하며 선함으로 포장해 결함(Defect)을 미덕(Virtue)으로 격상시키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지적하는 이들에게 차별주의자 혹은 혐오자라는 라벨을 붙여 그들의 지성적인 목소리와 논리적인 판단을 악으로 규정하려 든다.

결함이라는 것에 자기들이 만든 채점표를 가져와 사람들을 채점하고, 결함이 많을수록 그에게 선함이라는 훈장(Medal)을 달아주고 완장(Armband)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들은 결함을 숭배하고, 그 결함을 지적하거나 숭배하지 않는 자를 악으로 몰아세운다.

탁월한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고, 악으로 규정하여 그들이 뒹굴고있는 진창에 끄집어내려 쳐박고 모두가 엉망이 된 것을 두고 평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모자람과 결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에게 공짜로 거짓된 권리와 거짓된 가치를 부여하고 타인에게 “너의 결함과 모자람을 내가 묵인하고 네 존재를 승인할테니, 너도 나의 결함과 모자람을 묵인하고 내 존재를 승인하길 바란다.” 라고 강매하려 들기까지 한다. 이것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상호보완적 합의이자 하향평준화 된 계약에 불과하다.

 

진정한 가치는 합의가 아니다.

진정한 가치는 발견과 증명 속에 스스로 빛이 나는 것이다.

 

오염된 것, 모자란 것, 뒤틀린 것, 잘못된 것은 결함에 지나지 않는다.

결함을 선함이라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르크스(Sarx / σάρξ)를 소마(Soma / σῶμα)라 우기며 감히 그 둘을 동일한 것이라 정의하려 드는 심각한 오류이자 무능함과 방종일 뿐이다. 이는 그저 존재론적인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결함을 극복하고자 각자의 의지를 갖고 저항하고 노력하는 것은 선할 수 있으나, 그 결함을 선함이라 우기는 것은 결코 선함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근간이 되는 기둥을 흔들고 사회를 어지럽히며 문명을 붕괴시킬 뿐이다. 엔트로피를 높히는 궤변과 모순은 사람의 마음에 당장의 달콤함이라는 마약을 주입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무엇도 해결하지 못하게 이성과 논리를 빼앗아 거세시키고 생각하지 못하는 살덩이로 만들어 사유(思惟)하는 힘을 영원히 잃게 만든다.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빼앗긴 자의 영혼은 붕괴한다.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는 방향을 잃고 폭주할 것이며, 우시아(Ousia / οὐσία)는 폭주한 프네우마에 의해 오염되고 파괴될 것이다. 그에 따라 온토스(Ontos / Ὄντος)는 세개의 기둥을 잃고 붕괴 속에 형태를 잃을 것이다. 소마(Soma / σῶμα)가 슬러지화 하여 사르크스(Sarx / σάρξ)로 전락하고 타락하는 공포가 이것이다.

※진리 탐구 메모 참고(https://shearestis.tistory.com/98)

 

진리 탐구 메모

트리니티 시스템 (The Trinity System: Providence)이건 어릴적부터 내가 감으로 느껴오던 것을 2025년 12월 4째주 일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누워있다가 할 일이 없어서 대충 끄적여 언어화한 낙서임.감기

shearestis.tistory.com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황혼이 지나 밤이 찾아왔다고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명빛이 밝아오며 태양이 떠올랐다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치 또한 그런 것이다.

가치는 타협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오해 혹은 의도적인 왜곡을 일으키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기에 확실히 하겠다.

 

가치는 유행이 아니라 질서, 로고스(Logos / λόγος) 그 자체이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는 것이며, 모든 생명체에게는 태초부터 섭리가 우리의 영혼에, DNA에, 본능에 그 코드를 심어주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가치, 즉 미의 기준이나 물질적 재화 등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며 이것은 가변적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유행이나 도구, 장치와 같은 것이다. 이 가변적인 가치조차도 시대의 흐름, 에너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의 물결일 뿐이며 결국 흐르는 물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가치는 존재론적 위계 속에서 파도치는 가변성을 가질 수 있기에 때로는 애매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가치는 언제나 우리의 본능적인 부분에서 요동치는 욕망에서 기인하기에 가치라는 것은 타협이 아니라 욕망 속에 발견되고 증명하는 것이다. 타협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치를 두고 합의를 논하는 것은 가치를 식별하는 눈(이성)이 멀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을 부정하고 본능을 거스르는 가치는 결코 가치일 수 없으며 그것은 가치라는 단어를 이용해 억지로 라벨을 붙이고 타협을 시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치의 근원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욕망을 외면할 수는 있으나, 욕망이 그런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욕망은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저 욕망이 더럽고 추잡한 것이라 잘못 이해하고 외면한다면 욕망은 눈을 감은 이를 덮치고 삼키게 될 것이고, 욕망의 도구이자 노예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그렇기에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어떻게 나의 근원을 수단으로 여기고 도구로 만들지 고민하는 것이 욕망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욕망은 결코 악(惡, Evil)이 아닌 우리의 근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욕망은 명징(明澄)한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각성시켜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분별할 수 있게 개안(開眼)을 도울 것이다.

섭리가 허용한 자유를 이해한다면 방종하지 않고 절제(Temperance)와 질서, 중용 속에서 허락된 것을 구분하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가치와 그 속의 가변적 범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性, 리비도 : Libido)이 문란하다고 오해받는 것은 직시하지 않고 외면했기 때문이며, 재물(財物, Wealth)이 부정한 것 역시 직시하지 않고 외면했기에 생긴 오해에 불과하다.

 

성(性, 리비도 : Libido)이 없는 남녀의 사랑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으며 우정에 불과하다.

이것이 있기에 남녀는 하나가 되고 서로의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줄 수 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재물(財物, Wealth)이 있기에 수없이 많은 주관적인 기준들 속에서 모든 이들이 하나의 기준 갖고 화폐를 만들어 노동의 대가로 환산해 물건을 교환하고 누군가의 재능을 구매하는 등, 안정적인 사회를 이룩하고 국가를 세워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작금의 현실은 참혹하게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선하고 근면한 이들이, 타협해 억지로 쥐어짜낸 거짓된 가치를 들고 욕망의 도구가 된 한줌조차 되지도 않는 인간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사기꾼과 그들에게 부역하는 노예들에게 속지 않고 세상을 직시하려면 내면의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우시아(Ousia / οὐσία), 로고스(Logos / λόγος)에 의지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지 스스로 가려내고 소리내지 않는 수없이 많은 자들이 다같이 선함의 탈을 쓴 악을 향해 맞서 대항해야한다.

그리한다면 선함의 탈을 쓰고 다가온 악이 우리에게서 몰래 빼앗아 숨겨낸 가치를 다시 발견하고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위기 속에서 그리 했듯이 우리도 조상들의 피를 이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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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고라니 목장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καλοκαγαθία) 그리스어(헬라어)로 아름다움(Kalon, καλός)과 선함, 탁월함(Agathon, ἀγαθός)를 합쳐 만든 단어로, 육체적 아름다움(외면)과 정신적 덕(내면)이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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