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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평등의 가치를 왜곡하는 질투

세상에는 다양한 재능이 있다.

 

누군가는 글을 잘 쓰고,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리며, 누군가는 머리가 뛰어나고, 누군가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뛰어나며, 누군가는 음악에 재능을 갖고 있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이 외에도 분명 수없이 많은 재능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숲의 잎사귀처럼, 밤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이 있을 것이다.

 

시대를 타고나서 꽃 핀 재능이 있다면 아직 시대가 오지 않았기에 꽃피지 못한 재능이 있다.

재능을 꽃피울 환경을 만난 이가 있다면, 재능을 꽃피울 수 없는 환경 속에 죽어간 이도 분명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라고 무책임하게 감정적인 위로를 건넬 수는 없지만, 분명 재능이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살면서 지켜본 바로는 재능은 두가지의 형태로 발현되는 것 같다.

 

첫번째는, 그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태생적 재능이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불교의 윤회(輪廻)를 두고 말하자면 삶을 거듭하며 축적된 영혼의 기억들이 천재적인 재능으로 3차원 물질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인류의 과학은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고 우주의 삼라만상을 모두 설명하기는 커녕 빙산의 일부분조차 되지 못하는 영역에 머물러 있기에 비과학적인 이야기라고 마냥 무시할 현상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재능의 형태는 존재하고 있기에 부정할 수도 없고 말이다.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길게 하려니까 조금 민망해서(속된 말로 이뭔씹 스러워서) <뇌와 영혼의 상관관계 가설 https://shearestis.tistory.com/106> 쪽에 예전에 써둔 이야기로 대체하려고 한다.

 

뇌와 영혼의 상관관계 가설

IQ에 따라 지능이 결정된다고 함.뇌의 성능이란 말이지. 즉, 하드웨어. 그런데 나의 트리니티 시스템 가설(https://shearestis.tistory.com/98)에 따르면, 뇌는 단지 하드웨어이고 우리의 영혼이 지성을 발

shearestis.tistory.com

 

두번째는, DNA로 인해 발현되는 재능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부모 밑에 뛰어난 자식이 태어나 부모와 같은 천재성을 보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전적 재능조차도 위에서 언급한 첫번째 케이스와 결합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뇌와 영혼의 상관관계 가설>이 어느정도 작용하지 않을까 한다. 어떤 재능을 발현할 수 있는 DNA로 만들어진 몸에, 그 재능이라는 OS를 탑재한 영혼이 깃들어서 비로소 3차원 물질계에 우리가 아는 그 ‘재능’이라는 형태가 발현되는게 아닐까?

아무리 뛰어난 스펙의 컴퓨터가 있어도 그걸로 지뢰찾기나 웹서핑만 하면 하드웨어를 낭비하는 것이 된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 OS나 프로그램이 있어도 그걸 설치해서 제대로 돌릴 수 있는 컴퓨터가 없다면 결국 소프트웨어는 소용이 없어지는 것 처럼 말이다.

 

상속이라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무언가를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단지 물질만을 물려주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 속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식, 재능, 철학 등의 정신적인 자산도 포함된다.

상속은 인간의 사회를 발전시킨 ‘욕망’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내가 노력해서 일군 것들을 나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이들에게 물려줌으로서 그들이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며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이용해 열심히 현재를 살며 미래를 꿈꿨고, 그들이 일궈낸 것을 뒤에 서있는 나의 자식, 나의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땅일 수도 있고, 집이나 건물일 수도 있다.

또한, 내가 욕망이라는 원동력(프네우마 : Pneuma / πνεῦμα)으로 발휘해낸 재능(우시아 : Ousia / οὐσία)과 그것을 효율적으로 끌어내게 했던 수많은 노력과 궁리(로고스 : Logos / λόγος)가 곧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은 어떤 것(온토스 : Ontos / Ὄντος)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물질과 정신, 모두 다 상속이 가능한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신의 상속은 선하고 좋은것,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질의 상속을 천하고 악한것, 틀린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지식, 재능, 삶의 태도(철학) 등의 무형의 것을 물려받는 것은 바람직하다 칭찬하면서 정작 그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들의 삶을 바쳐 일궈낸 물질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손가락질 하는 것이다.

만약 그 물질적 상속이 부정과 부패 속에서 일궈낸 것이라면 당연히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사회의 신뢰라는 소중한 자원을 갉아먹는 비열함 속에서 일궈낸, 타인을 짓밟고 살아왔음의 증거이므로.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비열하게 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여전히 상식과 도덕, 윤리가 살아있는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부(富)가 무조건 부정한 수단을 이용해 일궜을 것이라 여기고 있는 자를 악(惡)으로 묘사하며 그들을 깎아내리고, 가능하다면 끌어내려 진창에 쳐박으려고까지 하는 이들이 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외로 간단하게 답이 떠올랐다.

그것은 ‘질투(嫉妬, jealousy)’ 라는 감정에서 비롯된 현상이였을지도 모른다.

 

얀테의 법칙(Jante Law, Janteloven)

공동체의 결속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탁월함을 억누르는 '질투의 시스템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당신이 남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내용으로, 이 법칙은 하향평준화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귀로 세상을 듣고, 자신의 몸으로 세상을 느끼기에 당연히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 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며, 타인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건 불가능하다. 다만, 자신이 중심이되 타인 역시 세상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범하는 오류가 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해서 노력하는 만큼, 남도 무언가를 원해서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망각하거나 아예 모르는 듯 하다.

또한, 내게 없는 재능이 남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이 자신에게는 없는 재능을 이용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재능도 노력도 없이 무언가를 바라면서,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를 가진 이가 그것을 갖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얼마나 갈고 닦았는지,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을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그것을 운(運, Fortune)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이걸 귀인 오류 (Attribution Error)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해 재능을 가진 이가 노력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그것을 물려받은 이 역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단지 그것을 부정함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며 분노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한 네가 가질 수 있다면 나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꼭 가진 자를 편 드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다.

잘 모르겠으면 위에 다시 읽고 와줬으면 한다. 이것은 가진 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 이를 옹호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졌음에도 노력하지 않고 방종하게 구는 이를 용납하지 않으며, 노력하고 싶음에도 가지지 못한 자의 절망과 슬픔을 결코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글재주가 없어서 그렇게 느껴진다면 어쩔 수 없지만.

 

상속은 노력의 누적값이라고 생각한다. 형태가 없는 재능과 철학 역시 선대에서 후대로, 시대를 거듭하며 전보다 더 발전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 속 많은 무형의 자산들이 다 그러하다. 처음에는 분명 나뭇가지로 돌을 두드리며 박자를 타던 인류가 어느새 다양한 악기와 컴퓨터를 이용해 놀라운 음악을 만들어내듯이, 과거에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던 인류가 어느새 박물관에 걸려서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명화를 그려내듯이, 마른 가지를 비벼 불을 피워내던 인류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들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해 현대문명을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미처 여기 언급하지 못한 수없이 많은 인류의 무형 상속자산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리고 물질 역시 노력의 누적값이라고 생각한다. 선대가 나의 삶 전체를 이용해 나의 후대에게 더 많이 누리게 해주고 싶어서, 더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노력하고 욕심을 낸 결과가 물질의 상속이라 생각한다.

 

물론 기회는 언제나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내가 내 자식에게 무언가를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나의 자원을 이용해 가르치고, 건네주고, 이끌어주는 행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봐선 안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도 자식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며, 그 노력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식이 ‘나는 이거 싫은데!’ 하고 손을 뿌리칠 수도 있다.

옆에서 지켜보는 갖지 못한 이가 ‘나에게도 저게 있었다면 더 잘 할 수 있었을텐데’ 라고 부러움을 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그래서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안전장치를 제공해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불완전할 것이다. 완벽하지 못하기에 여전히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갖지 못한 자가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의 축적과 상속으로 이어져온 우리 인류의 문명은 평등과 경쟁의 가치를 알고 있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재능을 가진 이들을 발굴하고, 갖지 못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시스템을 고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평등은 하향평준화(下向平準化, Leveling down)가 아니다.

공정(Fairness)하되, 질투(Envy)와는 다른 것이여야 한다.

누군가의 발목을 잡는 것은 결코 평등이 아니다. 자원을 강탈하고 노력을 폄훼하는 다수의 강탈은 결국 노력하는 자, 재능있는 자의 이탈을 가속화할 뿐이다. 이들이 이탈하면 결국 시스템에 기여하는 인재와 자본이 사라지기 마련이고, 결국 사회 전체가 붕괴하는 엔트로피(Entropy) 가속화가 일어나게 된다.

 

가진 자의 노력을 폄하하지 말 것이며, 가진 자는 방종하지 말아야한다.

갖지 못한 자에게도 노력할 권리가 있으며, 갖지 못한 자에게는 시스템이 환경을 만들어줄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바탕에 중용(메소테스 : Mesotes, μεσότης)이 있어야 하며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베푸는 이에게 감사할줄 알고, 받는 이를 모욕하지 말아야한다.

그리하면 베푸는 이는 자연스럽게 긍지를 갖고 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명예로운 자가 될 것이고, 받는 이는 그들이 내민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있는 자, 배운 자, 재능있는 자를 죄악시한 사회는 항상 붕괴하기 마련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그렇게 몰락했고, 문화대혁명은 중국에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상처만을 남겼다.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의 킬링필드 사건은 캄보디아를 철저히 몰락시켰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Iranian Revolution)으로 대학이 폐쇄되고 엘리트들이 숙청되며 국가의 두뇌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또한 샤리아(Sharia)의 도입으로 인해 이란의 자유로웠던 여자들의 삶은 송두리째 박살나고 망가져 검은 천 속에 갇혀야했다.

차베스가 “석유 자본을 국민에게!”라는 달콤한 말을 들고와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현혹했고, 그 결과 기업과 자본, 엘리트들은 하나 둘 베네수엘라를 빠져나갔다. 무능한 자들이 유능한 자들을 밀어낸 뒤 생산 기반은 철저히 붕괴했으며, 국민들의 삶은 고통과 비탄에 빠졌다.

 

잘난 사람을 질투하고 끌어내린다고 못난 자가 갑자기 잘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배운 사람을 끌어내린다고 못 배운 이가 갑자기 배움을 얻는 것도 아니다.

가진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이 못 가진 사람의 배를 불리고 지갑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군중의 질투를 이용한 저열한 자들이 모든 것을 다 가져갈 뿐, 결국 갖고싶었던 것은 갖지 못한 채 이용만 당하다 끝날 뿐이다. 심지어는 폐허로 변해버린 땅에 기존 사회의 질서라는 잔해가 내팽개져진 채로 군중을 선동한 이들이 약속한 낙원은 커녕 이전보다 못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성과 재능, 그리고 누군가의 노력을 질투하고 짓밟은 세상의 끝은 하나같이 초라했다.

우리는 과연 질투라는 마음을 평등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질투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평등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씌운 것인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되 질투에 사로잡혀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망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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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가치를 왜곡하는 질투: 고라니 목장

세상에는 다양한 재능이 있다. 누군가는 글을 잘 쓰고,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리며, 누군가는 머리가 뛰어나고, 누군가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뛰어나며, 누군가는 음악에 재능을 갖고 있다.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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