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에 종종 나오는 비혼모가 있다.
정자 기증을 통해 낳은 아이를 데리고 육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데, 아이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결핍된 채 태어난 이 아이는 종종 손님으로 방문한 남자 출연진들을 무척이나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잊혀지지 않는 장면 속 이 아이는 유치원 운동회 날, 같은 유치원 친구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빤히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우울해하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아빠를 원한다는 듯한 말을 하였고, 어머니는 그런 아이에게 “아빠 몫까지 엄마가 2배로 잘 할게.”라는 동문서답을 돌려주었다.
자연의 섭리는 생명체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태어나도록 설계되었다.
물론 교미가 끝난 후 떠나는 수컷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그 생명에는 ‘아버지’ 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일부일처제를 토대로 번영해온 종족이다. 물론 역사 속에는 일부다처제라는 시스템도 분명 함께 존재했지만 일부일처제라는 기본 틀 속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를 이용했기에 안정된 사회를 구축한 인간은 지구의 패권을 차지한 지배종이 되었다.
최근 들어 유독 뜨거운 주제로 올라오는 ‘비혼모(非婚母, Choice mom)’라는 개념이 있다.
위에 언급한 연예인처럼 정자를 기증받아서 결혼이나 남편 혹은 연인 없이 혼자서 자식을 낳는 여자를 말한다. 미혼모와는 다르게 남자와의 성적 관계 없이 순수하게 정자를 기증받아서 인공수정을 거쳐 임신하는 모양이다.
일부 사람들은 저출산을 이유로, 여성의 권리를 이유로 들면서 혼자서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한 여자들을 치켜세우고 옹호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이를 갖겠다고 욕심을 낸 여자에 대한 시점이고, 나는 좀 다르게 받아들였다.
태어날 아이의 입장은?
물론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분명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있느니만 못한 아버지가 있는 것 보단 차라리 능력있는 엄마 한명이 낫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은 아이들은 그럼 다 불행하냐?”
“미혼모가 낳은 자식들 중에도 성공한 사례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이건 비혼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갖다 댈 비교군으로 옳지 않다. 있느니만 못한 아빠라도 있는 것보다 낫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거짓 이분법(False Dichotomy)의 오류다. 이 세상에는 있느니만 못한 아빠와 아예 없는 아빠만 존재하는게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아예 없는 아버지는 추억할 수도, 미워할 수도, 스스로 관계를 놔버릴 수도 없다.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이다. 못난 아버지라 할 지라도 존재했다면 스스로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선택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은 아이들은 비록 유년시절 속 아버지의 모습은 없을지언정,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아이에게 이야기해줄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하지만 시작부터 아예 아버지가 없이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의 존재가 결핍된 상태를 상수(常數, Constant)로 갖고 태어나기에 이것은 본인이 살아가며 어떻게 노력하고 갈구해도 결코 가질 수 없다.
미혼모의 자식들을 비교군으로 놓는것도 말이 안 된다. 미혼모의 자식들은 사고 혹은 관계의 파탄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설계 단계부터 애초에 아버지라는 존재를 배제한 비혼모와는 다르게, 그들의 삶 속에는 어머니가 기억하는 자신을 만든 뿌리의 반쪽에 대한 실체가 있다. 미혼모의 아이들은 거부당했다는 사실도 그 뿌리의 일부이며, 아이는 이 사실을 직시하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미워하거나 극복할 기회라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비혼모의 아이들은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 당연히 누려야할 기둥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속에 태어나 자라고 그 둘의 손을 하나씩 잡고 세상으로 걸음마를 하는 것은 아이들의 권리이다. 비혼모는 단지 자신이 ‘아기를 갖고싶다’ 라는 마음만으로 아이에게 그 당연하게 주어져야할 권리를 빼앗아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혼모가 나중에 연애를 해서 남자친구가 생기고, 남편이 생길수도 있다.
물론 양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현실이 마냥 그렇게 이상적이지만은 않은 것이다.
모든 생물은 자신의 DNA를 이어받은 2세에 대한 욕심이 있고 그것은 생물학적 본능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악하다고 매도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렇기에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을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 당연한 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단한 일이라 칭송을 받을지언정,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를 손가락질 하거나 비난해선 안될 일이다.
비혼모의 케이스에서도 분명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운이 좋다면 좋은 남자를 만나 그가 비혼모의 아이들도 사랑으로 품어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 것이지, 그 여자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까지 사랑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에.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 자식까지 받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사실 남의 일이기에 쉽게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막상 내 일, 내 가족의 일이 되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나만 해도 쉽게 “아이들도 그 사람의 일부이니 당연히 받아들이는게 옳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결국 상처받는건 남자도, 어머니인 여자도 아니다.
나에게도 남들에게 다 있는 ‘아버지’가 생기는구나 하고 설렜을 아이들이 또다시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라고 생각한 이에게 거절당하고, 아이들은 상처를 받는다. 아이들이 그 아버지를 고른것도 아니다. 정자 기증의 과정에서 자신들을 골랐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어머니가 아버지를 골라왔고, 아이들에겐 선택권이 없었기에 아이들은 태어나던 그 순간처럼 여전히 무력한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나서 자신의 뿌리를 알고싶어 정자기증자를 찾는 과정에서 생기는 각종 사회문제도 심각하다.
정자 기증은 보통 익명으로 이뤄지고, 기증자는 자신이 알려지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고 정자를 기증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알 권리는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며 이 권리를 일방적으로 각 국가의 법원이 파기하고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서류 한장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기대에 들뜬 마음, 어쩌면 나에게도 아버지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찾아간 아버지들이 그들을 반겨주지만은 않는 현실에 좌절하게 될 줄도 모르고.
실제로 기증자들을 찾아간 아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가혹했다.
만남을 거부한 기증자들이 수두룩하고, 접촉을 허용한 기증자라 할지라도 이메일이나 편지라는 수단을 통하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직접 만난다 하더라도 법적으로 기증자와 아이들은 ‘남’이기 때문에 그저 기증자가 선의를 갖고 호의를 베푼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남을 거부당하고도 포기하지 못한 아이들이 서류를 이용해 기증자의 집 대문을 두드렸을 때, 그가 꾸린 가정의 가족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침입자에 공포와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기증자는 아이를 격렬하게 거부했으며 가족들은 똘똘 뭉쳐 외부의 침입자를 밀어내는 경우도 흔하다. 심지어 기증자의 자식들을 자신의 이복형제자매라 여기며 그들에게 접근해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갖지 못한 아버지라면 너도 가져선 안된다는 식으로 기증자의 가정을 파탄내려 하는 케이스도 있었고 말이다.
결핍에서 시작되어 태어나 결핍 속에서 자라야 했던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이 아님에도 가혹한 운명 속에 강제로 내던져진다.
삶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다. 지구는 결코, 단 한 순간도 우리에게 낙원이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낙원은 단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이 순간이 괴롭고 힘들지언정, 우리가 사는 이 곳이 척박할지언정, 내일은 좀 더 다를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으며 어린시절을 따뜻하게 장식해주고 지금도 언제든 돌아갈 품이 되어주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면 그곳은 낙원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손으로 낙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낙원을 만들 권리를, 단지 갖고싶다는 이유만으로 한 존재에게서 영원히 빼앗아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불행하게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죽여버리라는 것이냐, 라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다.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니 오히려 말이 안 된다. 어떤 선택에 의해 이 세상에 패대기 쳐졌던 납치되었던, 태어난 이들은 이미 태어나버렸다. 멋대로 죽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문제는 너무 어려운 문제다. 이 세상에 단지 갖고싶다는 욕망 하나로 인해 패대기쳐진 아이들은 어머니의 욕망을 영원히 대신 책임지며 살아가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라는 보상을 얻었지만, 아이들은 보상으로서 태어났기에 수단이 된 삶 속에서 다른 이들은 짊어지지 않은, 하지만 자신에게는 태어났을때부터 죽을때까지 영원히 짊어져야만 하는 이 욕망의 짐이 얹혀져서는 영원히 아이들의 삶을 짓누르는 것이다.
사랑해서 낳았다는 말은 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은 수단이 아니다.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
모든 존재의 영혼은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우시아(Ousia / οὐσία), 로고스(Logos / λόγος)가 태초부터 빛나고 있다.
그것을 단지 자신의 욕심에 따라 초대장도 없이 문 밖에 손을 뻗어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거나 납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들이 비혼모를 반대하는건 단지 여성인권을 후퇴시키려는 의도가 있거나 남성중심사회를 지키기 위한 그릇된 발버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옛날부터 인간이 일부일처제를 도입했고 지금도 그 일부일처제가 유지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니까. 옛날 사람들이 미개하고 멍청해서 일부일처제에 매달리고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오래된 것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우리가 전부 알 수 없을 뿐.
어머니가 되지 않는다고, 되지 못한다고 죽는건 아니다. 살면서 내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겠지만 그것이 삶 전체를 망가뜨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선택으로 인해 태어나기 이전부터 아버지라는 존재를 박탈당해야 한 아이들의 삶은 죽는 순간까지 영원한 공백이 존재하게 된다.
저출산이 심각하다 할지라도 아이에게 주어져야할 당연한 권리를 박탈하면서까지 해결해야할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차라리 소멸할지라도 단 한명이라도 결핍 속에 평생을 빈 자리를 눈물로 채워야하는 아이가 없기를 바라는건 내 욕심일까?
실내용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는 내내 긴 이야기를 적어내렸지만, 결국 내가 생각한건 간단했던 것 같다. 비혼모의 아이들에 대해 차별하는게 아니다.
단지 이런 이야기가 하고싶었던 것 같다.
나의 욕망을 이유로 누군가의 결핍을 설계하지 말라.
나의 욕망을 이유로 축복받아야 할 존재를 수단으로 삼지 말라.
나의 욕망을 이유로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지 말라.
갖고싶다고 모두 가질 순 없다: 고라니 목장
TV 속에 종종 나오는 비혼모가 있다. 정자 기증을 통해 낳은 아이를 데리고 육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데, 아이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엄마의 뱃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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