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휴식시간을 이용해 인터넷을 하는 것은 휴식을 취함과 동시에 뭔가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가 있나 찾아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매번 배움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얻는 것은 유익함이 아닌 어이없음이 압도적이였다. 오늘도 정말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주워들은 것이다.
다자연애(多者戀愛), 폴리아모리(Polyamory).
설명인즉 남자와 여자, 단 두사람의 사이에서 이뤄져야할 연애(戀愛)라는 사랑을 여러사람, 즉 다자(多者)가 공유한다는 진짜 말도 안 되는 개념이다. 폴리아모리는 다자를 뜻하는 Poly와 사랑을 뜻하는 Amor를 조합해 만든 단어인데, 이 역시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궤변(詭辯, Sophistry)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섭리의 이치이자 근원과도 같은 진리. 결코 가벼울 수 없으며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닌 쟁취하고 지켜가야 할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그 시작을 불러오며 계속해서 빛나기 위한 에너지로서의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외부의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에게서 사랑을 느낌과 동시에 그 사랑을 키우고 지켜가기 위한 논리와 이성으로서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 그리고 두 존재 사이에 공명하는 사랑 그 자체로서의 우시아(Ousia / οὐσία)로 이뤄져있다. 그토록 고귀한 공리(公理, axiom)를 두고 감히 다자연애니, 폴리아모리니 하는 이상한 신조어 따위를 만들어내면서까지 자신의 난잡함과 타락함을 가리는 라벨(Label)로서 스스로의 추한 모습과 결함을 가리려 들다니, 이 얼마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거리인가?
감히 사랑을 모욕하고 자신의 추잡스러움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의 행태를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기 앞서 귀찮으니 예전에 썼던 글들을 들고와 설명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 진리 탐구 메모 https://shearestis.tistory.com/98
진리 탐구 메모
트리니티 시스템 (The Trinity System: Providence)이건 어릴적부터 내가 감으로 느껴오던 것을 2025년 12월 4째주 일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누워있다가 할 일이 없어서 대충 끄적여 언어화한 낙서임.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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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형태 정리 https://shearestis.tistory.com/99
사랑의 형태 정리
사랑의 4단계 위계1. 최선의 사랑 • 정의: 서로가 서로의 진정한 이해자이자 등을 맞댈 수 있는 전우/파트너.• 특징: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무언가를 해주는 것에 대해 손해라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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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https://shearestis.tistory.com/101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팍스 로마나를 붕괴시킨 트리거는 로마인의 타락이였다.그들은 각종 신비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졌고, 더불어 그 끝에는 지금 우리가 부르는 LGBTQ까지 향락주의의 일부로 귀족과 지배계급들의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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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에 만들어진 세속적 종교 https://shearestis.tistory.com/112
21세기에 만들어진 세속적 종교
20세기까지는 세상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그 시절에는 비록 부족하고, 없고, 많이 미숙하고 곤란한 시대였지만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 내 이웃과 친구, 동료와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이 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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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https://shearestis.tistory.com/117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결혼은 타이밍이다’‘혼기에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있다’ 흔히들 어른들이나 기혼자들이 해주는 말이다.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고, 그것이 시기에 잘 맞물리면 결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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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https://shearestis.tistory.com/120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독 인상깊게 기억이 나서 써보고자 한다. 엄마가 외출할 때 집에 물건을 하나 놓고온 일이 있었다. 사실 흔한 일이다. 그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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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주는 행복 https://shearestis.tistory.com/121
아이가 주는 행복
흔히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있어.’ 어떻게 들으면 참 예쁜 말이라고 들릴 수도 있다.하지만 내 귀엔 도저히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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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4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오늘도 싱글벙글(은 무슨) 좀비같은 걸음으로 아침 요가를 하러 가는 길에 버스 옆면에 붙은 ‘결혼정보회사’ 광고를 봤다. 마음속으로 ‘싱글이세요? 전 벙글이에요.’ 같은 어디서 주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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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9
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καλοκαγαθία)그리스어(헬라어)로 아름다움(Kalon, καλός)과 선함, 탁월함(Agathon, ἀγαθός)를 합쳐 만든 단어로, 육체적 아름다움(외면)과 정신적 덕(내면)이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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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https://shearestis.tistory.com/128
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동창 중에 결혼 소식이 들려오는 친구가 있다. 솔직히 좀 놀라웠다. 이 친구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명품을 좋아해서 엄마의 가방을 가져와 자랑하듯 걸치며 이건 무슨 브랜드라고 고작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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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결정권은 너에게만 있었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33
그럼에도 결정권은 너에게만 있었다
얼마 전에 아이가 있는 지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벌써 몇달도 더 전의 이야기이므로. 하지만 아이 엄마는 뱃속의 태아가 딸이 아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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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관계와 양자역학 https://shearestis.tistory.com/138
인간관계와 양자역학
인간관계는 마치 양자역학과 닮아있다. 누군가 먼저 타자(他者)를 향해 관심을 보이고 관찰을 하며 그 삶을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정의한다면, 타자 역시 자신을 관찰한 이를 향해 관심을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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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과 찰나 https://shearestis.tistory.com/139
영원과 찰나
영원(永遠, Eternal).길고 긴 시간 속, 많은 필멸자(必滅者)들이 손에 넣기를 갈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시황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권력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원해 수은으로 만든 불사의 단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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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단 한번도 용납된 적이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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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물론 내가 위에서 정리해둔 <사랑의 형태 정리> 글에서는 4가지만 써놓았긴 한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녀, 즉 이성(異性) 간의 사랑에 대해 정리해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사랑을 ‘기분’에 멈추지 않고 중용(中庸, Mesotes)과 설계 의도를 토대로 각기 다른 층위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에서 정의한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 내가 예전에 써둔 <진리 탐구 메모> 속 트리니티 시스템 가설을 통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직접 사유(思惟)해보았다.
● 필라우티아(Philautia, 自己愛)
-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Self-love)
- 시작이자 근원이 되는 사랑
- 자기 존중
- 타자(他者)와 외부와 닿기 앞서 시작점이 되는 자기 자신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
- 자유와 질서, 절제 속에서 이뤄지는 필라우티아만이 필라우티아
- 방종, 무질서, 무절제, 속 무조건적인 자기긍정은 이것에 절대 해당할 수 없음
- 무분별한 자기긍정은 그저 도태이자 자기부정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필라우티아를 완전히 부정하는 행위
- 스스로를 인지하고 관측하여 섭리 속에 자기 자신을 바르게 정의하는 것
- 근원(根源), 시작, 거점
● 스토르게(Storge, 家族愛)
- 가족 간의 사랑
- 부모와 자식, 형제간의 혈연적 사랑
-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섭리에 의해 주어지는 '상수'
- 존재가 사회적 실체(우시아)로 성장하는 첫 토대
- 질서(秩序), 보호(保護)
● 필리아(Philia, 友情)
- 친구 간의 우정
- 깊은 신뢰와 공통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지적(知的)인 우정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Ἀριστοτέλης)는 이를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 정의
- 말이 통하는 대화가 이뤄지는 관계
- 서로의 로고스를 북돋우며 세상을 함께 해석하는 고귀한 상호작용
- 대등한 주체들 사이의 연대
- 신분, 나이, 항렬을 초월한 로고스(이성)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두 존재 사이의 공명
- 가치를 공유하는 관계
- 같은 곳을 바라보는 관계
- 이성(理性), 공유(共有)
● 에로스(Eros, 性愛)
- 남자와 여자, 즉 연인(戀人) 간의 사랑
- 남녀 간의 육체적·낭만적 사랑
- 남녀의 육체와 정신의 결합
- 양(陽)과 음(陰)의 조화
- 강렬한 끌림과 독점욕
- 함께 마주보는 관계
- 한 남자와 한 여자 단 둘만의 사이의 공명이자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
- 남녀의 배타적 합일
- 서로 다른 두 성별, 서로 다른 두 세계, 서로 다른 두 존재의 합일
- 대칭되는 존재의 합일
- <사랑의 형태 정리> 글에서 다룬 것은 에로스의 위계
- 열정(熱情), 합일(合一), 공명(共鳴), 압축(壓縮), 집중(集中), 독점(獨占), 대칭(對稱)
● 아가페(Agape, 聖愛)
- 대가 없이 내어주는 보편적 인류애
- 자기희생적이며 조건이 없음
- 희생(犧牲), 근원(根源)
-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내리사랑도 포함
이 위에서 언급한 5가지의 사랑은 발현, 즉 온토스(Ontos / Ὄντος)라고 볼 수 있다.
온토스는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우시아(Ousia / οὐσία), 로고스(Logos / λόγος)의 발현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
근원적인 사랑으로 볼 수 있는 5가지가 있다면, 그 5개의 사랑을 좀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개념의 사랑이 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이것을 단독으로 정의하지만 감정과 기분만 놓고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그것에는 균형을 이룰 로고스가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나는 다음의 사랑을 두고 위 5개의 사랑을 발현하기 위한 요소로 판단하기로 했다. 아래가 그것이다.
● 루두스(Ludus)
- 놀이처럼 즐기는 가벼운 유희로서의 성(性)
- 책임이나 헌신이 결여되어 있으며, 정복욕이나 재미를 추구
- 남녀 간의 에로스를 좀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한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밀당
- 지적, 정서적인 자극으로 방향을 틀 경우 육체적 쾌락을 배제하고 관계의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친목으로서 발현 가능
- 로고스의 둔화 방지와 프네우마의 가속을 도와줌으로서 관계라는 우시아를 견고히 만들어줌
- 루두스만을 추구했을 경우, 정신이 배제된 채 오로지 몸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방종함으로 타락
- 유희(遊戱), 쾌락(快樂), 자극(刺戟)
- 로고스(Logos / λόγος)에 해당
● 프라그마(Pragma)
- 실용주의, 물질주의, 현실주의
- 프네우마와 로고스를 결합하고 물질계에 발현해주기 위한 우시아
- 물질적 토대, 실력, 하드웨어
- 사랑을 키우고 지켜내기 위한 기반
- 프라그마만을 추구했을 경우, 관계를 이어주기 위한 감정으로서의 프네우마와 그 관계를 굳이 키워나가야 할 필요를 로고스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표면적 관계만을 남긴 형태로 전락할 수 있음
- 인내(忍耐), 타협(妥協), 실용(實用), 계약(契約)
- 우시아(Ousia / οὐσία)에 해당
● 마니아(Mania)
- 다양한 사랑을 증폭시켜주는 요소
-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사랑의 에너지
- 마니아만을 추구했을 경우, 감정과 욕정이 폭주해 사랑 자체가 훼손될 수 있음
- 광기(狂氣), 열정(熱情), 열광(熱狂), 집착(執着)
-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에 해당
원초적인 3가지 요소가 어떻게 조합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또한 내가 인식하고 관측한 타자(他者)가 누구인지에 따라 온토스로서의 사랑이 정의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루두스, 프라그마, 마니아, 이 세가지 사랑이 조합되어 누구를 향해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그것이 사랑으로 발현된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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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앞서 말한 폴리아모리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왜, 폴리아모리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아주 간단하다. 폴리아모리는 오직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할 에로스를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의 고결한 성애(性愛)로서의 에로스에는 당연히 루두스적인 성적 유희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에로스에서의 루두스는 에로스라는 목적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한 부수적 요소로서 존재하나, 폴리아모리는 에로스의 루두스만을 도려내어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사랑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 프네우마 - 우시아 - 로고스로 이어지는 삼위일체 구조가 무너졌기 때문에 온토스로서 발현할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유독 에로스를 왜곡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끼워맞춰 취사선택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21세기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황금기에 고개를 들어올린 질서와 절제를 무너뜨리고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집단이 그러하다. 그에 대해서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와 <21세기에 만들어진 세속적 종교>, 그리고 그 글에 이어지는 다른 글들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왜 그렇다면 그들은 자꾸 에로스의 영역을 침범하고 훼손하려 드는 것일까? 이에 대한 정답도 매우 간단하다. 폴리아모리가 그러하듯, 그들은 에로스를 발현시킬 때 들어가는 에로스적 루두스가 주는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며 자신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결함을 교정하고 치료와 교정을 받는 대신 결함 자체를 ‘정체성’ 이라는 라벨(Label)로 라벨링(Labeling) 해버리는 쉽고 빠른 지름길이자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이다.
직시하지 않고 외면한다 해서 결함이 사라지거나 결함이 아니게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직시하지 않고 외면해버린 결함은 결국 외면한 이를 집어삼킨다. 그리고 그 결함에 먹힌 이는 자신의 추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그 결함을 자신이라 착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도우려는 이들의 선한 손길과 호의를 거절하고 그것을 악(惡)이자 구시대의 잔재, 차별과 혐오라고 외치며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소리를 지르고 세상에 혐오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전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는 평범한 이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쌓아올린 문명의 질서를 뒤흔들며 견고하게 우리를 지켜주던 가치와 규범(規範)에 서서히 금이 가게 만들고 이윽고 붕괴하게 만드는 것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그러하듯, 지금 팍스 아메리카나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엔트로피(Entropy)를 높이는 것은 너무도 쉽다. 하지만 엔트로피를 낮추고 다시 네겐트로피(Negentropy)를 되찾는 것은 엔트로피를 높히는 것의 몇배, 몇십배, 몇백배가 들어간다. 어쩌면 어떠한 방법을 써도 원래의 질서와 절제 있던 그 고귀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인류의 역사가 딱 그러하다. 첫 주춧돌과 반석부터 제대로 놓았어야 했는데 거기서부터 뒤틀렸다. 그것도 모자라 새 벽돌을 만들기 귀찮다고 아랫돌을 빼서 자꾸 윗돌을 괴고 모른척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러니 흔들리는 것이다. 이것은 깨어진 찻잔의 조각을 모두 주워 이어붙인 것과도 같다. 깨어진 찻잔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조그마한 충격이 가해지기만 해도 예전과 달리 더 깨지기 쉬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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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사랑이 무엇이길래, 인류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사랑을 왜곡하고 직시하지 못한 죄값을 받고 있는 것인가? 앞에서 계속 설명해왔다. 그러니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굉장히 간단하다. 위에 이야기한 다양한 사랑의 온토스를 수단으로 삼아 모욕하고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를 해체시킨 죄가 인류의 역사 속에 너무도 오래 축적되어 임계점을 넘은지 오래였던 것이다.
사랑을 어떻게 모욕했던 것일까?
현재 많은 선진국가들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법으로 채택하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결혼제도로서 받아들이고 인정한 것이다. 그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일부일처제를 채택했으며,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허용한 국가나 역사적 배경 속에서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일처제를 선택해 살아갔던 것이다.
물론 일부다처제는 일부 능력이 되는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제도이며 부인과 첩 여럿을 거느리는 것에는 한명의 부인과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몇배의 자원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에 따라 대부분의 평범한 남자는 국가와 종교, 그리고 제도의 보호 아래에서 결혼이라는 의무 속에 최소한 1명의 여자와 맺어지는 것을 보장받았던 것이다. 자연계에서는 보통 상위의 알파 개체들이 대부분의 암컷들에게 매력을 어필하고 인정받거나 서열싸움에서 이겨서 번식의 권리를 독식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승자독식의 구조를 이성과 합의로서 파기한 뒤 모든 수컷이 자신의 2세를 남길 수 있는 세상을 보장함으로서 서열싸움이나 암컷에 대한 구애에 들어갈 자원을 절약해 문명을 이루고 지구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문화권의 모계사회나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 문화도 있지만, 그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문의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거나 신부의 지참금을 부담하기 어려운 사정 탓에 그리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형이하학(形而下學, Physics)에 따른 일부일처제의 타당성과 보편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제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에 따른 일부일처제의 타당성과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이는 좀 더 심오하고 난해할 수 있겠으나 최대한 풀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위에서 말한 ‘에로스’의 설명 중 음양의 조화와 합일, 대칭이 있다. 이에 따른 이야기이다.
전혀 다른 두 속성을 지닌 존재의 대립과 조화는 이미 많은 문화권에서 다루는 개념이다. 예를들어 중국의 ‘복희와 여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시지기(Syzygy), 많은 신화 속에서 다루는 빛과 어둠의 대립과 조화, 물과 불의 관계, 하늘과 땅의 조화와 그것에서 비롯된 창조 신화, 각 신화의 최고신과 그 반려인 최고여신, 신과 여신으로 모셔지는 다양한 부부신 등이 있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존재는 이렇듯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하나가 될 수 있는 상대를 갈망하도록 만들어졌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갈망한다. 이 갈망이 서로 끌리는 남녀를 결합하게 만들고, 이에 따라 또다른 존재를 생명으로서 탄생시킬 수 있도록 우리는 설계되었다. 그렇기에 모든 존재는 사랑을 갈망하며, 그 사랑은 나와 전혀 다르고 대칭될 수 있는 존재를 하나 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사슬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랑 속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조화를 이룬 일부일처제가 자연스럽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옛 이야기 속 선남선녀의 로맨스(Romance)에 열광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각종 음악과 곡, 역사에 기록된 남녀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 이야기에 울고 웃는 것 역시 섭리가 태초부터 우리의 가슴 속에 새겨준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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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부다처제가 이뤄진 문화권도 있고, 일부일처제를 채택하였으나 불륜을 묵인한 문화권도 있었다. 처첩제를 허용한 동아시아의 일부일처다첩제(一夫一妻多妾制), 최대 4명의 처를 허용한 중동의 일부다처제, 일부일처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결혼한 뒤 각자 정부와 애인을 두는 것을 서로 묵인한 서양의 결혼문화와 궁정연애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이들이 단지 정략에 의해, 자기보전을 위해, 자신의 육욕만을 채우기 위해 사랑을 모욕한 것들에 불과하다.
이전에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글에서도 했던 말이지만, 사랑은 그저 정신과 감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과 이성, 정신과 육체, 물질과 비물질의 조화 그 자체인 것이다. 한쪽만 존재해도, 한쪽으로 기울어서도 결코 사랑은 유지될 수 없다. 감정이 앞선 사랑은 그저 호감이고, 물질이 앞선 사랑은 조건에 반응한 것 뿐, 그것은 절대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은 ‘그래서’ 가 아닌, ‘그럼에도’ 여야 하므로.
과거 중국에서는 황제가 농촌에서 예쁜 여자아이를 모두 모아 궁으로 데려가 궁녀로 삼았다. 청나라 때에 와서야 나이가 든 궁녀는 출궁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전까지의 궁녀들은 종신직이였다. 자연적인 인간의 성비는 남자가 아주 약간 높긴 하나 1:1 비율에 가깝다. 그런데 여자들을 싹 다 긁어모아 궁이라는 공간에 가두고 결혼을 못 하게 격리하니 당연히 바깥에서는 결혼할 짝이 없는 남자들이 넘쳐났던 것이다. 짝을 찾지 못해 번식을 하지 못하는 수컷 개체는 인간 뿐 아니라 다른 종족을 포함해 매우 포악해진다. TV 프로그램 <동물농장>에 나오는 서열이 제일 낮은 도태된 수컷곰 ‘웅대’의 암컷곰 습격사건을 참고하면 쉽게 알 수 있듯, 자발적으로 번식을 거부하는 개체가 아니라면 번식에서 탈락하거나 번식을 못 하는 개체는 포악해진다. 이는 암수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다만, 유독 수컷이 더 포악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수컷을 남자답게 만드는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이 가진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중국에서는 몇차례에 걸쳐 광군(光棍)의 봉기가 일어났는데, 광군이라는 것은 잎사귀(자식)와 가지(아내)가 없는 독신 남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중국의 심각한 남초현상과 빈부격차로 인해 번식에서 실패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남자들의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일부일처다첩제에서는 본부인(本夫人), 정실(正室)으로서의 본처(本妻)의 권리가 보장되었다. 본처의 소생인 적자(嫡子)와 적녀(嫡女)에게만 신분과 상속의 권리가 보장되었던 것도 그 연장선인 것이다. 그럼에도 첩을 들였을 경우 본처가 겪는 고통은 결코 적지 않았으며 가문의 유대도 흔들리기 쉬워지곤 했다. 첩의 소생이 본처의 자식이자 적법한 후계자의 자리에 도전하고 가문의 재산을 탐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본처의 자리를 갖거나 신분의 제약 때문에 본처가 될 수는 없어도 실질적인 본처의 권리를 갖기 위해 본처를 살해하거나 모함해 가문에서 쫓아내려 하기도 했다. 이는 가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왕가나 황가와 같은 국가의 지배자 가문에서도 일어나는 일인데, 일반적인 귀족과 달리 왕과 황제의 자식은 모두 왕족이나 황족의 권리를 가질 수 있어서 후계자 전쟁이라도 일어날 경우 국가의 존망이 흔들리는 일도 흔히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일부다처제에서는 더 심각하다. 모두가 같은 부인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기 때문에 장자계승제가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가문의 후계자의 자리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던만큼 부인들은 남편의 총애를 얻어 자식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암투를 벌여야했다. 중동의 술탄은 이를 막기 위해 결혼 자체를 하지 않고 하렘을 만들어 그 안에 외부에서 납치하고 사들인 아름다운 이국의 노예와 권력자가 자신의 딸을 바쳤을 때 그를 하렘에 넣고 형식상으로나마 그들을 노예로 지칭하며 자신의 권력을 나눠주지 않음과 동시에 여자를 자식을 낳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켰다.
이 모든 일들, 그리고 여기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다양한 역사 속 사건과 흔적들이 사랑을 모욕한 행위에 해당한다. 그야말로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왜 남녀의 결합에 진정한 사랑이 필요한지 모른 채 재산, 권력, 성적인 육욕의 충족만을 목표로 사랑을 수단으로 삼은 결과가 저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긴 역사 속에서 크게는 국가, 작게는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밥먹듯이 모욕해왔다.
어쩌면 저것이 폴리아모리의 원형이라고 생각해도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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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녀의 성스러운 결합 속에 태어나는 하늘의 선물이자 섭리의 이치인 2세, 아이를 원치 않은 이들은 오직 성관계에서 오는 육체적인 쾌감만을 얻기 위해 아주 과격한 방법을 썼다. 이것은 일반적인 피임이 아닌,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관계를 통해 육체의 쾌락만을 취하는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본디 2세는 수컷의 생식세포가 성행위를 통해 암컷의 체내로 들어가 암컷의 생식세포에 도달해서 만들어지는 법. 이 원리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어도 남자와 여자가 몸을 겹치면 아이가 생기는 것을 알던 몇몇 멍청이들은 이를 회피하고자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결코 임신할 리 없는 ‘남자’의, 성관계에 쓰라고 만들어지지 않은 적합하지 않은 신체의 장기를 이용해 성적 쾌락을 얻어내려 한 것이다. 아, 이 글을 쓰면서도 솔직히 너무 역겨워서 머리가 띵해진다. 옛 그리스에서 성인 남자가 어린 남자아이의 성을 착취하는 대가로 그의 후견인이 되어주던 제도 파이데라스티아(Paiderastia)나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건너가 기겁을 했던 와카슈도(若衆道)와 같은 것이 있는데, 굳이 더 쓰려니 속이 역해져서 이만 줄이겠다. 미래에 이 일기를 읽을 미래의 내가 부디 이 대목을 읽다가 토하지 않길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것은 루두스만을 취하기 위한 인간의 꼼수에서 시작된 불결한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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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가 왜 옳지 못한지 생각하겠다고 계속 사유를 거듭한 결과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멀리 돌아와도 항상 사랑의 중심에는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가 있다. 폴리아모리도, 위에서 이야기한 사건들의 기본 구조에는 하나같이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의 불균형과 부재라는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단 하나의 완전히 다른 세계와 존재만을 갈망하고 추구해야할 에로스가 갈 길을 잃은 결과가 저 위의 사건들이다. 서로 하나 되어 마땅한 자들이 맺어지지 못하니 불협화음이 생기고 그에 따라 사회적 문제, 신체적 질병으로서 섭리를 어긴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단 한번도 용납된 적이 없다> 에서 이미 몇번이고 언급했듯, 옛 사람들은 위와 같은 방종이 사회와 문명을 붕괴시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은 자신들의 뒤에 살아갈 후손들이 이 처참한 폐허를 겪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양한 구전설화와 종교의 경전, 교훈 속에 숨겨둔 금기를 남기고 전함으로서 이 위험한 불장난이 두번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처절하게 몸부림친 것이다. 모든 수칙은 피로 쓰인다고 하였다. 이 역시 선조들의 피와 눈물로서 새겨져 우리에게 끝없이 누군가의 입과 손을 통해 전해진 것이리라.
섭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고, 속된 말로 ‘지 꼴리는대로’ 무절제하게 스스로를 던지며 자신의 타락을 합리화하려 한다. 그러나 섭리는 자비로우면서도 냉정한 이치를 모두에게 공평히 적용한다. 질서(秩序, Order)와 절제(節制, Temperance)라는 룰(Rule)을 어긴 이는 언젠가 섭리의 레드카드를 받고 방종의 계곡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게 되는 법.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뒤돌아서 다시 돌아올 기회 또한 섭리는 언제나 열어두고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멀리 길을 벗어난다면 결국 언젠가 죄의 무게가 온몸을 짓눌러 바닥에 쓰러졌을 때 비로소 되돌아가야겠다 마음을 먹고 뒤를 돌아본 순간, 다시 돌아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섭리의 이치이며 스스로가 저지른 죄를 스스로가 갚아야하는 법칙인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와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진리 탐구 메모> 에서 말했듯 섭리는 가장 근원이 되는 차원에서 우리를 관조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밑도 끝도 없이 믿어주며 무엇이던 허락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섭리 속에는 분명 사랑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직시하고 알아야한다. 그것이 우리의 고향이자 근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끌림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사랑을 육체적인 것, 육욕, 성적인 것에만 국한된다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이들은 사랑이 주는 쾌락과 신체를 자극했을 때 관성적으로 얻어지는 쾌감만이 사랑인줄 착각하며 매일같이 사랑을 더럽히고 모욕하고 있다.
방종하게 살거면 차라리 부끄러움이라도 알고 숨어서 혼자서 타락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잡아 자신이 끝없이 추락하는 낭떠러지로 끌고가 ‘함께 날자’고 추락하는 것을 날고 있는 것이라 속인다면 그는 누군가가 저지르는 죄의 무게와 누군가를 속인 죄의 무게까지 함께 짊어지게 될 테니 말이다.
사랑은 평면이 아니다: 고라니 목장
분명 휴식시간을 이용해 인터넷을 하는 것은 휴식을 취함과 동시에 뭔가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가 있나 찾아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매번 배움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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