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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사이버 체리피커와 시뮬라르크

근 몇년간의 강제 돌봄노동과 그로 인한 육체적 피로, 시간부족으로 인해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한지 꽤 되었다. 어쩌면 번아웃(Burnout)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원래도 잡생각이 많기 때문에 자는 시간 외에 항상 내 머리는 한번에도 몇개씩 동시에 서로 다른 생각들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내 머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직렬연산방식이 아닌, 병렬연산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남이 보기에는 정말 이상하겠지만,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나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일상이다.
 
예를들어 스플래툰 매칭 대기시간 30초에서 1분 사이의 짧은 시간동안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며, 게임이 시작되면 수시로 맵을 확인함과 동시에 전황(戰況)을 파악하고 실시간으로 전략(戰略)을 세우며 그와 동시에 머리속에서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생각이 같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게임이 끝나면 또 매칭을 넣음과 동시에 그 생각을 그림이나 글로 출력해내고 있고, 이것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실내용 자전거로 유산소를 함과 동시에 갤럭시탭의 화면분할 기능을 이용해 왼쪽에는 유튜브로 듣고싶은 교양강의나 게임공략(주로 일본 랭커들의)을 띄워놓고, 오른쪽에는 필기 앱(App)을 이용해 그걸 들으며 필기함과 동시에 자전거를 몇시간씩 돌린다던가.
 
상시 오버클럭(Overclock)이 되어있는 것 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게 내게는 평생 살아온 방식이자 일상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도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저녁시간에 게임을 하며 또 머리에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각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귀찮기 때문에 예전에 썼던 글을 들고와서 이어가겠다. 이 방식 정말 괜찮은 것 같다. 일일이 구구절절 이어가려면 몇만자가 넘어갈거고, 그럼 나는 게임 할 시간과 그림그릴 시간이 줄어들겠지? 하지만 예전에 써둔 글의 논리를 활용하면 좀 더 하고싶은 말을 빠르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게 참 괜찮은 방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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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블로그를 내가 살아온 삶의 일부를 담는 백업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림이나 만화를 그리다가 어느정도 분량이 쌓이면 그걸 모아서 블로그에 올려놓는데, 이걸 보면 내게도 한국 사람 특유의 기록을 남기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예전부터 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던 많은 생각들을 언어화한 글들도 블로그에 백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시간적, 체력적인 여유가 부족한만큼 그림보다는 예전부터 머리속에 차있던 생각을 꺼내놓는 쪽이 더 많아졌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블로그의 <사유의 정원> 에는 40개가 넘는 글들이 쌓이고, 지금도 쌓이고 있으며, 앞으로도 쌓일 것 같다. 물론 언제든 여유가 생기면 그림을 그리고 싶긴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머리속에 무언가를 그리고싶다 라는 마음이 예전처럼 떠오르질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번아웃이 해결될까 하는 마음이 종종 들기도 한다.
 
글을 올리면서 느낀건데, 이건 실제로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연구한 이야기이기도 하니 가져와봤다.
나뿐이 아니라 많은 창작활동을 즐기며 블로그나 SNS를 하는 이들이 자신의 공간(블로그나 SNS와 같은)에 일상(日常) 이야기나 개인적인 사유(思惟)를 담은 글을 올릴 경우 구독자들이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구독자들이 창작자를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정의하기보단 내가 소비하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자판기처럼 평면적으로 인식하고 있을 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인데, 이는 역할 고정 편향(Role-Fixed Bias)이라고 하여 심리학적으로 인간이 타인(他人)을 인식함에 있어 그 타인을 입체적인 인간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특정 기능으로 범주화 하려는 성향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내가 즐기는 콘텐츠를 제공하던 창작자가 어느날 갑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혹은 별로 궁금하거나 알고싶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고 있으면 그가 주기적으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생산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구독을 취소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블로그 뒤의 창작자, SNS 뒤의 창작자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 인식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재미있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무언가로 인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 된다.
 
구독자를 긁어모으고 싶다거나 명성을 얻고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블로그에 무언가를 업로드 하기 위해 방문하면 당연히 구독자 수가 보이기 마련이고, 그것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게 계속 보이다보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따라 오늘도 화면 속 에임을 맞추며 머리속으로는 전략과 함께 다른 생각이 함께 이어졌던 것이다.
 
내가 너무 구시대의 인간이라 그런것일까? 그래서 구독이라는 것에 대한 신세대의 문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사실 구독이라는 행위는 보통 어떤 창작자의 콘텐츠를 접하고 감상했을 때, 그의 콘텐츠가 재미있거나 유익하게 느껴져서 “이 사람의 콘텐츠를 더 보고싶다.” 라고 생각했을 때 이뤄진다. 나 역시도 그런 마음으로 구독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기에 잘 안다. 구독을 눌러두면 나중에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왔을 때 바로 알 수 있고, 추천이나 알림에 그의 콘텐츠가 뜨는 만큼 매우 유용한 기능이고, 무엇보다 구독자 수라는게 콘텐츠 제작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큰 힘과 응원이 된다고 한다. 내가 재미있게 감상한 콘텐츠를 올리는 이가 계속해서 창작활동을 이어가주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돈 한푼 안 드는 응원이라 생각하면 구독은 참 유용한 기능인 것이다.
 
이 구독에 대해, 그리고 구독자에게만 공개되는 제한된 콘텐츠를 보기 위해 구독을 누른 후 감상이 끝나면 바로 구독을 취소하는 이들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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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피커(Cherry picker), 케이크 위에 얹어진 체리만 골라서 빼먹는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
학계에서는 전문용어로 무임승차자(Free Rider)라고도 하는데, 위에서 말한 ‘구독’ 현상에서 체리피킹을 하는 이는 어디서 듣기로 전략적 해지자(Strategic Churner)라고도 한다. 대체 얼마나 심각하면 이걸 연구하는 학자가 있고 그를 정의하는 용어까지 만들어진 것인가.
 
맨서 올슨(Mancur Olson)의 집단 행동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에 따르면, 집단이 커질수록 '내가 기여하지 않아도 시스템은 돌아가겠지'라는 심리가 강해진다고 한다. 그에 따라 어떤 블로그나 SNS 계정이 공공재적 성격을 띠기 시작할 때 개인들의 무임승차가 시작되고, 자신들의 무임승차가 시스템을 붕괴하는 원인이 되지 않을것이라 생각하기에 이기적인 이득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사이버 공간에서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위에서 말한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은 개릿 하딘(Garrett Hardin)의 연구에 따른 이야기이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원에서 이기적인 개인이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할 때, 결국 그 자원이 고갈되어 시스템 전체가 파괴된다는 이론인데, 이는 내가 예전에 써둔 글 <진정 선과 악으로 세상을 양분할 수 있는가>에서 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비브 라타네 (Bibb Latané)의 사회적 태만 (Social Loafing)에 따르면 익명성이 보장된 환경에서 개인의 책임감이 분산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게임 이론을 두고 봤을 때, 구독자 전용 콘텐츠나 제한된 콘텐츠를 조회하기 위해 구독한 뒤 감상이 끝난 뒤 구독을 바로 해제하는 행위를 ‘배신(背信, Defeat) 전략’ 이라고 보기도 한다. 창작자라는 상대방이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자신의 콘텐츠를 공개)을 구했으나, 체리피킹(Cherry Picking)을 하는 구독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독자 전용 콘텐츠를 감상한 후 구독을 해제함으로서 배신이 성립되는 구조인 것이다. 다만 나는 구독을 해제하는 것이 왜 체리피킹 구독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위에서 말했듯이 구독을 해놓았을때 얻는 메리트와 창작자에 대한 존중이 더 크게 작용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 사이버 공간 속에서의 합리적 이기주의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던 말이다. 그럼 왜 체리피킹 구독자들은 체리만 집어먹고 케이크를 뭉개버리는 것일까? 위에서 언급한대로 그들이 정말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아서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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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으로 체리피킹 구독자들은 ‘단기적 정보 포식자’라고 볼 수 있다. 창작자가 구독자에게만 공개한 제한된 콘텐츠는 창작자가 세워둔 장벽 안에 있는 정보인데, 체리피커는 이 정보를 얻고는 싶어하지만 그 장벽 내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원치 않아한다. 그로 인해 제한된 정보를 얻기 위해 구독으로 장벽 안에 발을 들이고 정보를 얻음과 동시에 바로 구독을 취소하는데, 이는 정보의 비대칭성 탈취 (Information Asymmetry)인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이득이라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 그리고 정보만 빼내고 연결을 끊음으로써, 자신만 일방적으로 정보를 소유했다는 우월적 정보 그 자체인 것이다. 
쉽게 말해, “나는 창작자에게서 공짜로 구독 한번 딸깍 해서 정보를 얻어냈지만 창작자에게 내가 구독자 수로 집계되는 것을 막고 나의 관심을 주지 않겠다.” 와 같은 뜻이라 이해하면 편하다.
 
수전 피스크(Susan Fiske)와 셸리 테일러(Shelley Taylor)의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인지적 자원(집중력, 기억력, 관심)을 최소한으로 쓰려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체리피커는 자신의 구독 목록에 누군가가 남아있는 것 자체를 ‘관리해야 하는 것’ 혹은 ‘주의력을 낭비시키는 것’으로 인식하고 ‘필요한 데이터(결과물)는 추출하되, 내 인지 시스템에 노이즈(지속적 알림이나 연결)를 남기지 않겠다’는 관리 효율의 극대화를 꾀해 자신의 인지적 자원을 아끼려 한다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의 호혜성 원리(Reciprocity)에 따르면 인간은 무언가를 받으면 보답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한다. 이는 섭리의 순환이라는 이치를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받은것에 대해 돌려주는 것을 원치 않은 체리피커는 콘텐츠를 감상한 후 구독이라는 연결을 끊어버림으로서 심리적인 의무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저 위의 아이디어가 그들의 심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직접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하지만 체리피커들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그들이 집어올린 체리의 주인은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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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체리피킹 구독자는 체리만 집어먹고 가버리는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겠다.
 
근시안적 최적화(Myopic Optim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이건 경제학에서 가져온 이야기인데, ‘눈 앞의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장기적인 큰 이익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체리피커는 지금 이 순간 구독으로서 원래는 얻지 못할 정보를 얻은 것에 취해 만족하며 미래에 발생할 재구독의 번거로움이나, 구독 알림을 지켜본 콘텐츠 업로더(창작자, 블로그主, SNS主 등)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종종 체리피킹을 자주 시도해 콘텐츠가 업로드 될 때마다 구독을 하고 바로 취소하는 짓을 한 사람이 창작자에게 차단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걸 보면 분명 업로더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또한 체리피커는 자신의 구독목록과 알림에 흔적이 남는 것을 눈에 보이는 손실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용성 편향(Availability Bias)과 손실 회피(Loss Aversion)에 따라 위에서 말한 근시안적 최적화를 위해 눈 앞에 보이는 구독해제라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으로 이 손실을 회피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그것이 상대방에게 무례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지고 그에 따라 자신이 받을지도 모르는 이후의 패널티(Penalty)는 그들에게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니터와 스마트폰 액정에 떠있는 콘텐츠 뒤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거나 아예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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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체리피킹을 당한 경험이 있다. 종종 일어난다. 그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체리피킹의 일화가 있어서 그것을 예시로 들어보겠다.
 
2차창작을 하다보면 SNS에 게시를 하는 일이 있는데, 모든 창작물을 전체공개로 게시하는 것은 아니다. 팔로워를 늘린다거나 하는 목적이 있어서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의도적으로 창작물을 공개하는 것은 아니고, 내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이 창작물은 조금 민감할 수 있다’ 라거나, ‘이 창작물을 올렸을 때 올 후폭풍을 굳이 감당하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과 같이 자기방어적인 이유로 종종 창작물을 게시할 때 제한을 걸기도 한다.
 
모 게임을 재미있게 즐겼고 엔딩을 본 뒤 감동과 아쉬움이 동시에 남아 이것저것 게임을 하며 떠올린 생각들을 그림으로 그려내곤 했는데, 그 중 좀 철학적인 이야기임과 동시에 ‘해당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슬프게 비춰질 수도 있는’ 상황의 이야기를 그려냈던 적이 있다. 워낙 SNS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이들도 있고, 나는 그런 것을 감당할만큼 기력이 충분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냥 아는 사람끼리 같이 보고 이 주제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게시물을 올렸는데, 갑자기 SNS의 알림창에 누군가의 팔로우 알람이 뜬 것이다.
 
프로필 사진을 보니 종종 나의 SNS에 반응을 해주던 사람이였고,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것에서 은근히 내적 친밀감을 품었던 모양이다. 세대 차이가 좀 나는 것 같아 망설여졌는데, 종종 나의 타임라인 너머로 보이는 사람이였기에 그가 올리는 게시물이 가끔 보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종종 게시하는 사람이기에 이번 기회에 그의 글을 읽고 싶다 생각해서 그의 프로필을 클릭하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는 나를 구독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다. 그는 체리피킹을 한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별것 아닌 일이다. 하지만 나는 좀 완고한 성격을 했고, 좀 고지식하고 올드한 면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안다. 이것이 예의에 어긋난다 생각했으며 동시에 굉장히 무례하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건너편에서 종종 바라보던 사람에게 품었던 호감이 비호감으로 바뀜과 동시에,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별것 아닌 사건이고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일지라도 내 가치관 속에서 그는 정말로 무례했으므로.
 
이런 체리피킹을 몇번 당하다보니, 나 역시 체리피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싫어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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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공간의 체리피커라는 것을 알게되자 관측이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내게 무례했던 체리피커들을 분석하게 되었는데, 체리피커들에게서는 시뮬라크르(Simulacrum)의 특성이 관찰되었던 것이다.
 
시뮬라크르(Simulacrum)란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정립한 개념인데, “원본이 없는 복제물” 혹은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가짜”를 의미한다.
 
이는 레플리카(Replica)와는 혼동될 수 있지만 전혀 다르다.
레플리카는 그것이 원본의 복제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제작되었으며 모두가 인정하는 진짜같은 가짜다. 즉, 모두가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고 원본이 무엇인지도 알고있는 것이다. 이는 나의 <진리 탐구 메모> 속 트리니티 시스템 가설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레플리카는 원본의 우시아(Ousia / οὐσία)만을 취해 가져와 그것을 완벽히 모방해낸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원본의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와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배제하고 오로지 우시아만을 취했기에 그것은 ‘가짜’이고, 아무리 원본과 똑같이 재현해내도 절대 원본이 될 수 없음을 모두가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원본에 프네우마와 로고스가 존재함을 알기에, 레플리카는 ‘가짜’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복제를 거듭함에도 변함 없이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뮬라르크(Simulacrum)는 다르다. 원본 자체에서 우시아만이 원본이라 착각하고 프네우마와 로고스를 배제한 채 우시아만 복제한다. 그러나 프네우마와 로고스가 없는 상태에서 복제를 거듭하는 바람에 변이가 일어남에 따라 우시아 자체도 손상되어 파괴되고 만다. 시뮬라르크는 프네우마와 로고스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에 그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원본의 우시아를 유지하는 동기(動機)로서의 프네우마와 이유(理由)로서의 로고스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복제가 거듭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없어진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보자면 SNS상에서 유행하는 ~챌린지와 같이 모든 이들이 그 밈(Meme)을 소비하며 똑같은 구도의 사진과 영상을 찍고 같은 연출을 하지만, 정작 이게 왜 유행하고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시뮬라르크의 위험한 점은 이것이 물건이나 현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사람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에게 주입된 사상에 심취하고 누군가가 붙여준 라벨(Label), 자신이 소속되었다 착각하는 집단이 주는 허상의 권력에 취해 누군가의 꼭두각시나 허수아비로 전락하기 딱 좋기 때문이다. 특히 시뮬라르크가 된 인간이 정의감이나 선민의식까지 갖추게 된다면 그만한 괴물도 없는 것이다. 위에 참고하라고 올려둔 글들을 보면 그 위험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시뮬라르크가 된 인간에게서 유독 체리피킹 성향이 보였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말할 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겪어온 바로는 그러하다.
 

◈◈◈

 
창작을 하는 이들은 그의 재능의 크기와 빈도수, 명성에 관계 없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창작’ 이라는 것이 가지는 무게와 고통 그리고 즐거움인데, 이는 창작이라는 것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작을 통해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과 그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 그에 따른 고통을 겪어본 이들은 체리피킹을 시도하는 것에 한번 정도는 마음의 필터가 장착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렇다고 체리피커가 아예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창작자 중에도 체리피커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을 가진 다른 창작자 혹은 견제하고자 하는 창작자의 콘텐츠가 궁금은 한데, 자기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것 같다 생각해서 구독을 유지해주기는 자존심이 상한다고 체리피킹을 하는 이들도 많긴 하다.
 
오히려 체리피킹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본 이들이 역으로 그 체리피킹으로 다른 창작자를 공격하거나 견제하는 수단으로 휘두르기도 하니 어찌 보면 질이 더 나쁠지도 모르겠다. 몰라서 행한 악은 무례함이지만 알면서 행하는 악은 그냥 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소비만을 하는 이들에게서 일어나는 체리피킹은 다음과 같다.
창작이 아닌 소비만을 즐기는 이들은 창작이 가져오는 빛과 어둠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모자라고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저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래 배려와 존중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그들은 상대방이 자신이 즐기는 콘텐츠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만들었으며 왜 그걸 만들고 싶어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체리피킹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개중에는 시뮬라르크화 한 인간들도 존재한다. 이것은 SNS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벌문제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이게 너무 피곤해서 누군과 교류하는 것을 주저하곤 한다.
 
이는 내가 직접 사이버상에서 관찰했던 현상인데, 다음과 같다.
먼저 어떤 창작자가 창작활동을 통해 콘텐츠를 SNS상에 업로드하며 즐긴다. 그에 따라 그의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며 즐기게 된다. 여기서 SNS에서 파벌을 형성한 이들이 그에게 접근하고, 그를 파벌 내로 들이기 위해 접선하며 공을 들인다. 아무것도 모른채 자신에게 주어지는 호의를 받고 파벌의 사람들과 친밀해진 창작자는 점점 그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그들의 입맛대로 그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들이 가져온 유머코드에 맞춰 콘텐츠를 생산하고, 그에 따른 파벌 내의 칭찬과 찬사가 쏟아지며 그것이 점점 창작자의 족쇄가 되는 것이다. 또한 창작자가 파벌 밖의 다른 사람들과 더 친하거나, 라이벌 파벌의 사람과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견제함에 따라 그 창작자는 점점 고립되며 파벌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이 창작의 목표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내가 겪은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창작자 친구들이 하나 둘 이런 일을 겪는 것을 보고 왜 자신이 이토록 괴롭고 우울한지 알지 못하며 끙끙대는 모습을 보고있는 것은 아무리 남의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또한, 파벌의 접선에도 그들과 친해지지 않았을 경우에 일어나는 일 역시 매우 추악하다.
자신이 갖지 못하면 남도 갖지 못해야 한다는 심리가 그러한 것일까? 그들은 파벌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창작자에게 접근한 자신들의 시도가 좌절되면 사냥감으로 점찍었던 해당 창작자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주로 “그까짓 그림 좀 그린다고 콧대가 높네.”, “별것도 아닌 그림 그리면서 대단한 재능이라고 튕긴다.”, “그림그릴 줄 안다고 그림쟁이들끼리만 뭉쳐서 사람 차별한다.” 같은 여러가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가져와서 파벌 내 사람들끼리 고개를 맞대고 그를 ‘별것 아닌 재능 갖고 잘난척 하는 자’ 혹은 ‘사람 가려받는 차별주의자’ 같은 라벨을 붙여가며 그를 깎아내리고 좌절된 그들의 욕망을 서로 위로해주곤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경우 그들은 원래 그들이 노렸던 창작자를 멀리하지는 않고 계속 지켜보다가 체리피킹을 하는데 다음과 같다.
 
창작자가 구독자 제한의 콘텐츠를 게시했을 때, 파벌 내의 1명이 대표로 구독을 누르고 그 콘텐츠를 조회한다. 그리고 캡쳐 기능 따위를 이용해 그것을 불펌해서 파벌이 모여있는 톡방에 올려서 돌려보기도 하고,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걸 아는 이들은 알음알음 자기들끼리 DM이나 1대1 메세지로 공유하고 안 본 척 서로 입을 다물어주기로 암묵적 합의를 보던 것이다.
이 경우의 체리피킹은 위에서 언급한 체리피킹과는 결이 다르게 악의(惡意)로 가득 차 있는 공격성을 띠고 있다. 그들은 ‘나’와 관계를 맺어주지 않는 창작자에게 나의 구독 1이라는 카운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서 그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교류할 것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체리피킹을 함과 동시에, 그를 단죄하는 것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유치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이는 시뮬라르크적 통제 욕구와 가스라이팅의 교류방식인데, 정보를 훔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체리피킹 자체를 공격행위 그리고 협박수단으로 써먹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거절한 창작자를 일방적으로 구독하는 상태를 패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콘텐츠만 빠르게 '탈취(체리피킹)'한 뒤 즉시 구독을 끊음으로써, "나는 널 구독하지 않고 네 정보만 빼먹었다." 라는 가짜 우월감을 챙기려 한다. 이는 자신들을 거절한 창작자의 관심을 얻어내기 위한 정서적 구걸에 가깝다. 어쩌면 디지털 스토킹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즉, 이 경우의 체리피킹은 좌절된 지배욕의 일그러진 발현이 아닐까 한다.
 

◈◈◈

 
고작 구독 취소가 뭐라고 별것도 아닌 것에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길게 생각을 이어가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겪어본 이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손가락 한번 딸깍 하고 콘텐츠를 감상한 뒤 다시 딸깍 하는 사람이야 즐기고 잊으면 그만이지만, 뒤에 남겨진 이들은 모욕감과 그 무례함이 남기고 간 여러 감정을 떠안아야 한다.
 
위에서 공유지의 비극에 대해 말했는데, 무언가를 창작해서 내놓는 이들은 분명 자신이 그러고 싶어서 뭔가를 창작하고 자신만의 공간에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것이 무료이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해서 그것이 공유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것을 공유지라 착각하고 쉽게 무례를 범하고 그것을 만든 창작자를 모욕하는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온라인이던 오프라인이던 건너편에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같이 피가 흐르고, 웃고 울줄 아는 인간이 말이다. 분명 정말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냥 기분이 좀 나쁘네 하고 잊고 넘어가면 될 별것도 아닌 일이다. 그러나, 낙타를 무너뜨리는 것은 잔뜩 쌓아올린 짐 위에 얹어진 마지막 깃털 하나라는 이야기가 있다. The straw that broke the camel's back(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지푸라기 하나)라는 속담인데 깃털이라고도 하고 지푸라기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임계점(Critical Point)과 인과율의 누적을 나타내기에 너무도 꼭 맞는 이야기라서 가져왔다.
 
쌓이고 쌓인 작은 생채기들이 모여 창작자에게 새겨지고, 어느날 갑자기 묵묵히 견디며 자신의 삶을 살던 이에게 더이상 견디지 못할 어떤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냥 구독 취소의 경험 누적일 수도 있고, 그가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며 겪는 삶 속의 크고 작은 좌절이나 시련들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창작자의 영혼에 상처를 안기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생각없이, 예의없는 체리피킹 구독 취소로 막타를 친다면? 그가 모두에게 기꺼이 열어두었던 공유지로서의 온라인 공간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들로 인해 마음을 닫고 자신의 사이트를 폐쇄하고 사라져버린 창작자들을 많이 지켜봐왔다. 그들의 아름다운 세계를 더이상 감상하지 못하게 된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상처 속에 꺾여버린 이의 뒷모습이 너무도 외롭게 느껴졌다. 또한 그를 상처준 이들이 혐오스러움과 동시에 가여웠다.
 
알지 못해서, 단지 나 하나 편하자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겠다고 인간은 어릴적 부모님에게 안겨 걸음마처럼 배웠던 어린 시절의 도덕을 잊고 사는 것 같다.
 
‘배려’
 
쉽고도 어려운 그 단어. 이 개념을 잊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자신 역시 배려받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섭리는 언제나 공정하다. 내가 저지른 업(業)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며 그것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이번생일지 다음생일지는 그 업의 무게에 따라 천차만별일 뿐 언젠가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상대방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한번쯤은 체리를 들어올리기 전 케이크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https://posty.pe/oz2ghs

사이버 체리피커와 시뮬라르크: 고라니 목장

근 몇년간의 강제 돌봄노동과 그로 인한 육체적 피로, 시간부족으로 인해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한지 꽤 되었다. 어쩌면 번아웃(Burnout)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원래도 잡생각

www.postyp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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