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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온토스는 훔칠 수 없다

예전에 개독에게 포교당한 적이 있다.

이 민폐의 역사는 올해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지금까지 잊을만하면 한번씩 꼭 튀어나와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개독에게 무례한 일을 겪은 것에 대해서는 이전에 써둔 글에 충분히 많이 언급해뒀으니 이번에 굳이 쓰지는 않겠다.

 

◆ 베드로의 천국, 막달레나의 낙원 https://shearestis.tistory.com/136

 

베드로의 천국, 막달레나의 낙원

아브라함 계통 종교, 그 중에서도 한국에선 유독 개신교는 항상 타인에게 숨쉬듯이 무례하다.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 무리를 발견했다. 보통 전단지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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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렬한 어부가 심해로 가라앉힌 로고스의 별 https://shearestis.tistory.com/137

 

졸렬한 어부가 심해로 가라앉힌 로고스의 별

아브라함 계통 종교에서 아담과 이브 부부가 야훼가 낙원에 심어둔 뱀의 속살거림에 따라, 야훼가 낙원 한 가운데 보기 좋게 심어놓은 선악과를 따 먹고 지혜를 얻고 낙원에서 내쫓겨 선악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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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탈자와 기만자는 손을 잡았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42

◆ 로고스를 제단에 바치지 않겠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44

◆ 사막의 모래바람은 어디서 불어왔나 https://shearestis.tistory.com/147

 

◆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https://shearestis.tistory.com/101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팍스 로마나를 붕괴시킨 트리거는 로마인의 타락이였다.그들은 각종 신비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졌고, 더불어 그 끝에는 지금 우리가 부르는 LGBTQ까지 향락주의의 일부로 귀족과 지배계급들의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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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에 만들어진 세속적 종교 https://shearestis.tistory.com/112

 

21세기에 만들어진 세속적 종교

20세기까지는 세상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그 시절에는 비록 부족하고, 없고, 많이 미숙하고 곤란한 시대였지만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 내 이웃과 친구, 동료와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이 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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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2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세상에는 참 듣기 좋은 말이 많다. “너는 소중해”, “네 기분이 곧 법이다” 와 같이 인간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삭제한 채 감성(Pathos,πάθος) 만을 자극하는 비논리적인 포장지로 둘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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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인을 짓밟는 난쟁이 https://shearestis.tistory.com/118

 

거인을 짓밟는 난쟁이

SNS를 하다보면 본의아니게 이상한 이야기들을 많이 주워듣게 되는 것 같다.보다보면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요상한 신조어(新造語, Neologism)가 넘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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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9

 

결함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καλοκαγαθία)그리스어(헬라어)로 아름다움(Kalon, καλός)과 선함, 탁월함(Agathon, ἀγαθός)를 합쳐 만든 단어로, 육체적 아름다움(외면)과 정신적 덕(내면)이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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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의 가치를 왜곡하는 질투 https://shearestis.tistory.com/126

 

평등의 가치를 왜곡하는 질투

세상에는 다양한 재능이 있다. 누군가는 글을 잘 쓰고,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리며, 누군가는 머리가 뛰어나고, 누군가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뛰어나며, 누군가는 음악에 재능을 갖고 있다.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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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리당한 신성은 어디에 있는가 https://shearestis.tistory.com/146

 

박리당한 신성은 어디에 있는가

엑소시즘(Exorcism)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말로는 퇴마(退魔)라고 한다. 풀어서 쓰면 마를 쫓아낸다는 뜻으로, 주로 대상에게 깃든 악(惡)한 영적 존재를 쫓아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카톨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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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 체리피커와 시뮬라르크 https://shearestis.tistory.com/148

 

사이버 체리피커와 시뮬라르크

근 몇년간의 강제 돌봄노동과 그로 인한 육체적 피로, 시간부족으로 인해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한지 꽤 되었다. 어쩌면 번아웃(Burnout)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원래도 잡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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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을 이어가며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많은 이들이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서 현실과 다른 나를 연기하며 살아간다.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가상의 공간에서 되고싶었던 ‘나’를 연출하기도 하고, 자신의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끌어내 창작활동을 즐기고 그 결과물을 업로드 하기도 한다. 잊고싶은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에서 사람들은 현실에서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이 아닌 자기가 정의한 자신이 될 수 있기에 사이버 세상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중용(中庸)이 깨져버린 결과는 언제나 파멸 뿐이다. 섭리의 이치에 따라 이는 현실을 넘어 온라인 세계에서도 적용되는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사이버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이(奇異)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일들이 현실과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는 것 처럼.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과거를 통해 지금을 알 수 있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듯, 지금의 온라인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과거 인류가 남긴 발자취를 그것의 정체와 근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전에 써둔 글들 중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구조와 근원에 대해 파헤쳐본 글들이 있다. 이미 했던 말을 길게 반복할 이유는 없으니 짧게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

 

<베드로의 천국, 막달레나의 낙원> 에서는 선민의식과 사유(思惟)하기를 포기하고 섭리가 준 선물인 고귀한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스스로 지워버린 자들의 비극과 그 죄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했다.

 

<졸렬한 어부가 심해로 가라앉힌 로고스의 별> 에서는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의 영지(靈知)를 이해하지 못하고 질투하며 빼앗으려다 결국 제 것으로 만들지도 못한 채 기울어진 반석 위에 기독교를 세운 베드로(Petrus)가 인류에게서 어떻게 예수의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로고스(Logos / λόγος)를 지워낸 채 예수의 제자라는 지위가 주는 명성에 취해 스승을 박리시켜 우상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스승의 동반자를 감히 질투하고 시기한 끝에 그에게 창녀의 낙인을 찍어 깎아내린 것도 모자라 그가 가져야 했을 지혜의 관을 훔쳐내어 교황의 관으로 왜곡하고 제 머리에 눌러 쓴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찬탈자와 기만자는 손을 잡았다> 에서는 갖지 못한 자가 누군가의 재능을 시기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가진 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파괴한 뒤 그 능력을 주워 자신의 권력으로 삼으려는 이의 르상티망(Ressentiment)에 대해 이야기했다.

 

<로고스를 제단에 바치지 않겠다> 와 <사막의 모래바람은 어디서 불어왔나> 에서는 찬탈자와 기만자의 사기극을 철저히 파헤쳐 진리를 가리고 있던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빛을 직시하고자 했다. 그와 동시에 그 어둠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이것을 이용했는지 해부해 보았다.

 

그리고 그 다섯 편의 글들을 합쳐본 결과,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 

 

그 옛날 황야의 모래바람을 맞아가며 도망자이 모여 약탈이나 하고 살던 샤슈(Shasu) 족의 신으로서 모셔지던 야훼가 있었다. 그들의 신앙을 이어받은 겐(Kenite)에게서 모세가 이집트에서 잠깐 시도되었다 좌절된 아케나톤(Akhenaten)의 유일신 아톤(Aten)을 모시던 이들과 함께 도망쳐서 샤슈와 겐의 신앙을 아톤 신앙에 섞어 유대교의 뼈대를 세웠다. 그리고 가나안의 땅으로 건너가 원래 살던 이들을 쫓아내고 핍박하여 그들의 신을 받아들이게 강요하고 자신들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한 것이다.

 

이 역사, 이 패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사이버 체리피커와 시뮬라르크> 를 쓰며 서브컬쳐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이 온라인 공간이라는 사교계에서 벌이는 저열한 암투를 떠올리게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또 쓰기에는 귀찮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지저분한 이야기를 굳이 또 서술하고 싶지 않으니 생략하고 바로 넘어가려 한다.

 

서브컬쳐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의 모두가 그렇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그들 중에 유독 SNS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활동에 집착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우리 인간은 3차원 물질계에 실체를 지닌 유기생명체로서 지구라는 행성의 실제 공간에서 살아가며 타인과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정의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관측당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 푹 빠져든 이들은 실존하는 현실이 아닌 가상 공간에서의 삶을 주(主)로 삼고 현실을 서브(Sub, 副)로 삼는 본말전도(本末顚倒)가 일어난 자(者)들이 많이 보인다. 어쩌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과 원치 않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원하는 자신을 연출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온라인 세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커뮤니티 문화에 심취해 특정 사이트에 적(籍)을 두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으며 같은 생각이나 처지를 지닌 이들과 모여 교류한다. 이는 인터넷 게시판이 될 수도 있고 사이트에서 지원하는 카페일 수도 있으며 SNS일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인터넷 공간이 있고, 그곳에 모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형태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외로운 이들이 모여 서로를 보듬어주는 것은 어쩌면 보기 좋은 모습일지도 모르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의 내면이 충만한 이들이 모여 교류하고 서로를 보듬어 주는 것이 아닌, 결핍을 가진 이들이 한데 모여 비틀린 내면을 부끄러움 없이 과감하게 펼쳐놓고 전시하는 것이 흉이 되지 않는 가상의 공간에서 그들은 한데 모여 누구의 상처가 더 크고 누가 더 많은 결함을 갖고 있는지 자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더 나은 자신이 되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대신, 상처의 크기와 갯수를 포인트로 환산해 서로에게 완장과 훈장을 달아주는 타락의 길을 선택해버린다. 

 

 ◈◈◈

 

그러나 현실에서 그저 좋은 학벌을 갖지 못해서, 남들이 알아다니는 직장을 다니지 못해서, 외모가 못생겨 이성에게 매력적이게 느껴지지 못해서, 가진게 없고 가난해서,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뛰어난 재능이 없어서와 같은 이유로는 절대 권력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결핍과 결함에서 오는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판 자체를 엎고 게임을 무효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대의명분(大義名分)이 필요한 법. 명분 없는 전쟁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폭력이고 테러에 불과한 저열한 범죄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현실의 속성은 명분이 될 수 없었다. 아니, 아마 정상적인 사람들은 코웃음이나 치고 가던 길을 가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러 등을 돌릴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열등감에 가득 찬 이들은 <사이버 체리피커와 시뮬라르크>의 후반부에 서술해둔 자기들만의 파벌을 만들고 그 속에 갇혀 자신들의 목소리를 서로에게 들려준다. 

 

처음부터 그들이 자신의 결핍과 결함, 그리고 열등감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 너도 나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자신의 결핍을 꺼내놓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사상의 근친교배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에코체임버(Echo Chamber, 반향실 효과)에 갇힌 이들은 곧 이성을 잃고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 ‘이것이 세상의 전부’ 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세상 밖으로 나와 질서(秩序, Order)와 절제(節制, Temperance)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선량한 상식인들이 사는 세상을 뒤흔들 수 없음을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임체인저(Game Changer)가 바로 PC주의, 워키즘(Wokeism)인 것이다. 

 

◈◈◈

 

공산주의도 의도는 선하게 시작했다. 자본가들이 독차지한 자원을 빼앗아 갖지 못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공평히 분배하며 모두 다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며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결과를 정당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탄광의 광부들이 매몰되어 고통 속에 죽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노벨(Alfred Nobel)이 다이너마이트(Dynamite)를 만든 것을 평생토록 후회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인류를 위해 기여한 이들에게 써달라며 남겼겠느냐는 말이다. 식칼도, 망치도, 송곳도 모두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다. 그것이 선한 의도로 만들어졌다 해도 누군가가 그것을 이용해 생명을 해한다면 도구의 선한 발명의도로서 악행을 덮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하나 착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못 박고 가겠는데, 노벨이 악하다거나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고자 한 말은 절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선한 의도가 악용되는 것을 보고 눈물흘리며 괴로워한 고귀한 영혼을 지닌 거인이므로.

 

PC주의에 대해서는 이미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경 PC주의> 와 <21세기에 만들어진 세속적 종교>를 시작으로 다양한 사유를 이어갔고 그에 따라 적어내린 글들이 많이 있다. 귀찮으니까 길게 말 안 하고 이전에 썼던 글의 논리를 가져와 이어가도록 하겠다.

 

위에서 이야기한 결핍과 결함 속에 상처받은 이들이 에코체임버에서 나와 무기로 삼은 것이 바로 PC주의인 것이다. 그들의 결함을 대의명분으로 바꿔주는 컨버터(Converter)로 이만한 것도 없을것이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지혜로서 사람들을 인도하려 한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우시아(Ousia / οὐσία)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프네우마와 로고스를 빼내고 엄격한 규율과 복종만을 떼어내 권력을 휘두른 베드로처럼, 그들 역시 약자를 존중하자는 선한 의도 속에서 Why와 How를 떼어낸 채 엄격한 계율(戒律)과 교리(敎理, Dogma)로서 왜곡하고 사람들을 속박함과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의심하는 것을 죄악으로 규정해 반기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듣기에 좋아보이는 이야기와 의심을 품고 반대의견을 꺼내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며 없는 죄를 고백하여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꼭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과 지혜를 배제한 베드로의 비뚤어진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와 같지 않은가? 이들의 프로파간다(Propaganda)는 문명을 지탱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이끌어왔던 수없이 많은 지혜와 질서의 기둥을 하나 둘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것을 진정한 자유이자 인권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서 그 옛날 동굴속에서 돌을 떼어내고 불을 피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조상들이 지켜온 가치를 하나같이 구시대의 미개한 것이라 감히 깎아내리고 폄하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세상의 비바람에서 지켜주는 지붕이고, 그 지붕을 지탱해주는 견고한 기둥이자 우리가 안심하고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반석 그 자체인 것도 모른 채.

 

그리고 이 사상은 약자와 소수자를 무조건적인 선(善)이자 여태껏 소외되어 온 만큼 마땅히 권력을 갖고 휘둘러야 할 존재로 정의했다. 더 결함이 있을수록, 더 결핍이 있을수록, 상처가 많을수록 그들이 규정한 사상 점수가 높게 책정되었다. 채점표에 더 많은 결핍이 체크될수록 한 인간이 살아온 삶과 그의 영혼이 가진 가치관과 관계없이 권력이 주어지고 원죄를 짊어진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억지로 짜내 고백하고 사죄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핍과 결함만을 안고 살아온 이들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세상의 눈에 자신이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채점표가 되어준 것이다. 그렇다. PC주의와 워키즘이라는 시뮬라르크(Simulacrum)는 훌륭한 사상적 키메라로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소외받은 이들을 대신해 자신들이 갖고싶었던 가치를 갖고 있는 이들을 물어뜯고 도륙해줄 괴물이 탄생했다.

 

◈◈◈

 

결핍과 결함을 약자성으로 치환할 컨버터를 얻은 소외집단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서브컬쳐계를 장악해 나갔다.

 

PC주의와 워키즘을 만들고 그에 심취한 이들은 사회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가 암세포처럼 증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손을 댄 수없이 많은 분야 중 하나가 문화계인데, 이로 인해 관객의 취향을 저격하는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어야할 작가와 제작사들이 PC주의의 교리를 어기지 않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고 그들이 정한 웃기지도 않은 약자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못생기고 매력없고 현실성 떨어지는 이야기와 캐릭터를 끼워팔기 하기 시작하며 문화계는 침몰해갔다. 그 디즈니의 처참한 재무제표를 비롯해 대중의 외면, 돈의 흐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디즈니에서 특정 작품을 영화화 한 뒤의 매출과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 발생한 손해, 소니(Sony)의 야심찬 7년의 기획 속에 탄생한 희대의 망작이자 천문학적인 투자금을 공중분해 시켜버린 게임 콘코드를 떠올려보면 된다.

 

다른 쪽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온라인 세계에 심취해 현실을 외면하고자 한 이들이 서브컬쳐계를 장악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PC주의라는 확성기를 손에 들어올렸다. 그들은 SNS 공간에서 자신들을 나타내는 완장을 계정의 닉네임 옆에 잔뜩 붙이고 외부에서 끌어온 통치와 권력장악을 위한 신앙의 경전 속에 나오는 라벨(Label)을 이용해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을 검열해대기 시작했다. 매력적이고 육감적인 캐릭터를 보며 ‘성적대상화’라고 무작정 깎아내리고, 강인한 의지를 갖고 용기있는 여자 캐릭터가 나오면 그를 향해 ‘여성서사’ 라며 그저 추켜세우기 바빴다. 이 외에도 그들의 경전 속에 나오는 수없이 많은 이상한 단어와 개념들이 있으나, 나는 그 심연을 오래토록 들여다보기를 거부하였기에 무엇이 있는지를 전부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종종 인터넷을 서핑하다 보면 파도에 쓸려오듯 보이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허상이고 세상의 상수(常數, Constant)를 부정하며 질서와 균형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해 제멋대로 구는 것을 해방이라 여기는 것은 그저 근시안적인 착각이자 오만이고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억지에 불과한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의 교리에 어긋나는 창작을 하는 이를 매장시키고, 맥락을 읽지 못하고 그들의 경전 속에 악(惡)으로 규정된 단어 하나에 꽂혀 창작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사이버 화형대에 달아서 마녀사냥을 하며 권력이 주는 달콤함에 취한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핍과 결함으로 인해 현실에서는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강자의 포지션을 점거했다. 그러나 내면의 충만함과 진정한 힘에서 나오지 않는 권력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지나지 않기에 그들은 들고있던 경전 속 교리를 과격하게 수정해가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들 속에서도 순혈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은 정상인들이 그들에게 시달리다 어느순간 임계점을 맞이하며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지표와 후폭풍, 후유증이 나타남과 동시에 그들을 참아주지 않고 배척하고 방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더이상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사기를 칠 수 없음을 알아챈 이들은 하나 둘 다시 에코체임버로 기어들어가 서로를 끌어안고 과격해질대로 과격해진 경전 속 교리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외부의 악(惡)을 더이상 잡아서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광장에 묶고 형을 집행할 수 없어졌기에 그들의 갈 곳 잃은 칼날은 서로를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중 누가 더 PC하고 누가 더 깨어있으며 누가 더 결함이 있고 결핍되었는가? 누가 더 약자인가? 누가 이 채점표에 더 많은 체크를 할 수 있는가에 따라 순혈성이 강해졌고, 자신들이 부리던 키메라처럼 괴물이 되어갔다. 서로를 물어뜯고, 하나 둘 처형하며 결속을 강화하는 그들의 모습은 동양의 주술 중 벌레와 동물을 한데 몰아놓고 뚜껑을 닫은 뒤 마지막 하나가 남을때까지 기다리는 고독(蠱毒)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저 결핍과 결함으로 인해 현실에서 상처받고 외면받았던 이들이 질투와 열등감 속에 쥔 녹슨 칼로 결국 스스로를 찌르게 된 것이다.

 

◈◈◈

 

질투와 시기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쫓아내고 로고스를 찬탈하고자 하였으나 그 로고스의 한 조각조차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와 PC주의에 심취해 확성기를 들고 홍위병을 부리고 사냥개가 되어 누군가를 도륙한 이들이 닮아있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것일까? 그러나 긴 시간동안 인터넷 공간에서 설쳐대는 그들을 지켜본 결과 나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베드로와 21세기의 결함자들은 닮아있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갖지 못한 고귀함, 신분, 예수의 사랑,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함께 사유할 지혜를 질투했다. 21세기의 결함자들은 현실에서 결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질서와 절제 속 가치와 진정한 힘을 가진 평범한 이들을 질투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짓밟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 들었으며, 21세기의 결함자들은 평범한 이들에게 원죄의 족쇄를 채우고 그들이 가진 가치와 진실된 것들을 악으로 규정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거짓은 진실을 가릴 수 없으며, 아무리 가로막아도 바늘구멍만한 틈만 있으면 빛은 새어나오기 마련이다. 섭리의 이치는 결코 부정할 수 없으며, 아무리 그것을 부정하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섭리의 일부이며 섭리의 법칙으로서 빚어지고 살아가며 죽고 다시 태어나 순환하는 것은 바뀌지 않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결함과 결핍을 가진 자신을 직시하고 잠시만이라도 기계에서 손을 떼고 인터넷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는게 좋을 것이다. 스스로의 결함을 외면한다 한들 그 결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극복할 수 없는 결함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을 깎아내려서 하향평준화를 노리는 것보다 나 역시 저렇게 되고싶다 소망하고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 되겠다 마음먹는 것이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손에 얻을 확률이 더 높다.

 

동경하는 이들의 온토스(Ontos / Ὄντος)를 보면서 그들이 그 온토스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프네우마와 우시아, 로고스를 지불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의 온토스만을 훔치려 드는 것은 현명한 전략이 될 수 없다. 

 

온토스는 현상이자 발현이다. 프네우마, 우시아, 로고스의 균형 속에 발현되는 가치인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 온토스는 훔칠 수 없다. 훔쳤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저 허상이고 스스로를 속인 것에 불과하다. 훔쳐낸 허상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변수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차라리 나의 온토스를 고결하게 발현시킬 수 있게 스스로의 프네우마와 우시아, 로고스에 기대서, 비록 힘들지라도 어려운 길이지만 정직하고 부끄러움 한 점 없는 길을 선택하는 것을 권하고싶다.

 

자신의 프네우마를 빛나게 하고, 우시아를 견고히 하고, 로고스로서 사유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훔친 것, 빼앗은 것, 억지로 우겨 만들어낸 거짓된 것이 아무리 크게 느껴져도 그것은 결국 손에 넣을 수 없는 남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고통스럽게 어둠을 걸어나와 빛을 바라보며 스스로 내딛은 끝에 얻은 것은 비록 보잘것없고 작아보일지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별이 되어 ‘나’ 자신이 되어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