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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정원

비출산과 출산보류자는 다르다

나 아닌 타인과 대화를 하다보면 새로운 것을 알게된다. 내가 세상을 보는 시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점을 빌려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긴다. 세상의 곳곳에는 섭리가 숨겨둔 진리가 있고, 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보물찾기를 즐기며 어떤 진리가 숨겨져 있을지 찾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하다못해 지나가는 구름과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이름 모를 꽃 한송이 풀 한포기에도 깃들어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직시하고 관측하는 자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오늘도 대화를 통해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 안티나탈리즘(반출생주의, Antinatalism), 비출산(非出産)과 비혼주의(非婚主義)

 

모두 하나같이 결혼과 출산에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는 개념이다. 나 역시 미혼이자 비혼인 한 사람으로서 내 삶 속에 이 결정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고민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고민을 또 일일이 쓰기는 귀찮으니까 이전에 쓴 글을 가져와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 외로움의 무게 https://shearestis.tistory.com/109

 

외로움의 무게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무게를 견디며 고통을 겪고 외로움에 사무치며 살아간다.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선택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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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https://shearestis.tistory.com/117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결혼은 타이밍이다’‘혼기에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있다’ 흔히들 어른들이나 기혼자들이 해주는 말이다.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고, 그것이 시기에 잘 맞물리면 결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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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장을 보낼 권한 https://shearestis.tistory.com/119

 

초대장을 보낼 권한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아이를 잉태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것은 아이를 이 세상에 초대하는 것이다. 남녀는 부부가 되고, 부부는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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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https://shearestis.tistory.com/120

 

쉬운 자식인 딸, 어려운 자식인 아들

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독 인상깊게 기억이 나서 써보고자 한다. 엄마가 외출할 때 집에 물건을 하나 놓고온 일이 있었다. 사실 흔한 일이다. 그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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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주는 행복 https://shearestis.tistory.com/121

 

아이가 주는 행복

흔히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있어.’ 어떻게 들으면 참 예쁜 말이라고 들릴 수도 있다.하지만 내 귀엔 도저히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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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4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오늘도 싱글벙글(은 무슨) 좀비같은 걸음으로 아침 요가를 하러 가는 길에 버스 옆면에 붙은 ‘결혼정보회사’ 광고를 봤다. 마음속으로 ‘싱글이세요? 전 벙글이에요.’ 같은 어디서 주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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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고싶다고 모두 가질 순 없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5

 

갖고싶다고 모두 가질 순 없다

TV 속에 종종 나오는 비혼모가 있다.정자 기증을 통해 낳은 아이를 데리고 육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데, 아이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엄마의 뱃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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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https://shearestis.tistory.com/128

 

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동창 중에 결혼 소식이 들려오는 친구가 있다. 솔직히 좀 놀라웠다. 이 친구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명품을 좋아해서 엄마의 가방을 가져와 자랑하듯 걸치며 이건 무슨 브랜드라고 고작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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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들은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https://shearestis.tistory.com/132

 

그대들은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해 많은 예언가들과 예언서가 20세기의 끝과 종말을 경고했음에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아니, 인간들의 눈에는 끝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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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결정권은 너에게만 있었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33

 

그럼에도 결정권은 너에게만 있었다

얼마 전에 아이가 있는 지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벌써 몇달도 더 전의 이야기이므로. 하지만 아이 엄마는 뱃속의 태아가 딸이 아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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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비혼을 두고 이기적이라 정의하는가 https://shearestis.tistory.com/135

 

왜 비혼을 두고 이기적이라 정의하는가

기혼 유자녀인 지인과 대화한 적이 있다. 어쩌다보니 그의 심각한 고민을 듣게 되었고 내 나름대로 괜찮은, 미래지향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던 기억이 난다. 리스크가 있지만 지인이 고민중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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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평면이 아니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52

 

사랑은 평면이 아니다

분명 휴식시간을 이용해 인터넷을 하는 것은 휴식을 취함과 동시에 뭔가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가 있나 찾아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매번 배움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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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인의 사유(思惟)에 불과한 일기에 뭐 이렇게 많은 글을 전제로 제시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기 쓰느라 귀한 저녁시간을 다 보내는건 너무 비효율적인 일이다. 안그래도 난 일기를 쓰면서 동시에 게임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딴짓을 하는 스타일인데, 효율적이게 즐거운 휴식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을 뿐이다.

 

◈◈◈

 

주변을 둘러보면 결혼하지 않은 비혼자(非婚者),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비출산주의자(非出産主義者)가 꽤 보인다. 그만큼 21세기에 들어서 인간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 높은 지능을 가진 인간들은 출산이 가져오는 메리트(Merit)와 디메리트(Demerit)를 저울질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무작정 나이가 차고 관성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 심사숙고 끝에 한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세상에 초대해 100년의 시간을 살아가도록 하는 행위가 갖는 무게를 알고 그를 행할지 행하지 않을 지를 결정하는 시대가 왔으며, 비혼과 비출산이 처벌받지 않는 시대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 중에는 자발적 비혼, 비자발적 비혼인 미혼(未婚), 자발적 비출산, 난임이나 여러 사정으로 인한 비출산 혹은 출산보류자(出産保留者)가 있는 것으로 나는 판단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냐면, 오늘 나눈 대화가 내가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개념들을 언어화해서 꺼내놓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화는 다음과 같다.

 

주변 지인 중 결혼 후 딩크를 선언한 딸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딩크와 비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중 어떤 오류를 발견한다. 그래서 그에게 출산보류와 비출산의 차이에 대한 내 생각을 들려주었다.

 

“비출산은 살아가는 시간 속에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관찰하고 이에 따라 이 세상에 어떤 존재를 초대하지 않는 것이 이타적이라고 생각한 이들의 결정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비출산이나 딩크라고 한 사람이 뒤늦게 아이를 낳았다면 그들은 비출산, 딩크가 아니다. 그저 환경과 여건이 되지 않아 출산을 ‘보류’ 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다. 진정한 비출산은 선언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며 증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듣는 이가 잘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같은 결과에 도달할지라도 그 결과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이 다르다면 비혼과 미혼, 비출산과 출산보류를 한데 묶어서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이는 좀 다르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부부 사이가 소원하더라도 아이가 그 골을 메워주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위에서 내가 참고하라고 써둔 글들에 보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이 있다. 그에 따라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아이는 교구(敎具)가 아니고, 부부는 부부 둘만으로 그 사이를 충분히 해결해야한다. 아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기에 부부의 사이를 메꾸는 도구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뭐, 언제나 그렇듯 이런 이야기의 끝은 메신저 공격으로 막을 내린다. 니가 뭘 아느냐고 감정적인 대응이 나오고 대화는 종료되는 패턴이 언제나 이어지기 마련이다. 딱히 말싸움을 하거나 상대를 긁고 이기고 싶었던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늘 상대방은 화가 나거나 꼬롬해지는 반응을 보이고 말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대체 왜? 진솔한 대화를 청해온 것은 항상 내가 아닌 상대방인데도 말이다.

 

◈◈◈

 

미성년자가 2차 성징을 맞이하거나 20살 생일을 맞이해서 법적으로 성인이 된다고 갑자기 어른이 되는건 아니다. 그냥 아이에서 남성, 여성이 되어가는 것이자 법적으로 미성년자의 지위가 보장해준 촉법의 보호를 잃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의무를 지게 되게끔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몸만 어른이지, 평생 10대 20대의 그 마음을 품고 살다 죽는 사람도 많다.

 

어른과 성인(成人)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좀 다르다.

성인은 생물학적, 법적 기준을 충족해서 법률적인 행위를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모두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자신의 자유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냥 나이가 차면 자동으로 승급하는 것이므로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어른이라는 것은 그냥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무작정 될 수 있는것이 아니란 말이다. 정신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성숙하고 주변이 그것을 인정할 때 그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하자면 성인은 나이가 차면 자동으로 오르는 레벨, 어른은 스스로를 단련해 만들어내는 랭크업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어른과 성인을 동일시 하는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려고 했을까? 옛날에는 보통 결혼을 한 사람을 ‘어른’으로 취급해주는 문화가 있었다. 그것은 사회의 일꾼을 재생산하고 증식하기 위한 초석으로서, 그리고 사회를 유지하는 자에게 어떤 어드밴티지를 줌으로서 계속해서 뒤에 올 사람을 보급하기 위한 랭크 승급전 시스템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 계통 종교 중 사제의 결혼이 허용되는 종교는 기혼자에게만 사제나 종교지도자의 자격을 허락하기도 했고, 동서를 막론하고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여자는 사회적 불이익을 겪거나 마녀 혹은 악녀로 몰리기도 했으며 강제로 결혼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하지 않은 자녀가 있는 경우 그 집의 가장을 처벌하기도 했고, 노총각에게 수치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하게끔 해서 페널티(Penalty)를 주는 등, 결혼과 출산을 당근과 채찍을 통해 장려해왔던 것이다. 그 당근 중 하나가 ‘어른’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근대에 들어 인권과 자유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처음으로 비혼이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을 권리로 인정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나 법은 처벌하지 않더라도 사회에 남아있는 관성적인 문화는 여전히 비혼과 비출산을 좋지 못한 눈으로 보기도 한다.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기혼자들 중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결혼과 출산을 후회하는 자들은 유독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한 이들을 향해 으스대거나 티배깅을 하는 경향이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그럼에도 결정권은 너에게만 있었다> 에 나오는 지인이나 다른 사례들을 겪으며 느낀 것인데, <아이가 주는 행복>에서 이미 말했지만 자신의 결혼생활에 후회가 없거나 만족을 느끼는 이들은 보통 다른 사람을 공격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없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길을 간 이를 존중함과 동시에, 자신들에게 조언을 구해오는 자에게 스스로의 결정에 대한 단점을 보여주는 것에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단점과 장점 모두를 이야기해주며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이를 존중하고 그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러나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한 이들에게 티배깅을 하는 이들은 어쩌면 자격지심(自激之心)이나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들의 티배깅이 딱히 비혼이나 비출산을 선택한 이들에게 와닿는 데미지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고 ‘어른’으로서의 포지션을 이용해 타인이 자신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결혼과 출산을 선택한 자신의 삶을 전시함으로서 초조함을 느낀 비혼과 비출산자가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물론 정말 행복한 결혼생활 속에 타인에게 결혼과 출산을 권유하는 순수한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알 수 있을테니 한번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본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물어보라 하고 싶다. 적어도 자신의 삶에 진정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타인을 ‘공격’해서 비어있는 자신의 내면을 채우려 하지는 않으니 그것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결정권은 너에게만 있었다> 와, <왜 비혼을 두고 이기적이라 정의하는가>에서 언급한 사례를 참고한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

 

‘아이를 키우며 어른이 된다’는 표현을 위에서 언급했는데, 이는 뒤집어서 말하자면 아이를 낳기 전에는 ‘미성숙’한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다고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위에서 언급한 성인과 어른의 사전적 차이와 같은 이야기인데, 아이가 태어났다고 갑자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갑자기 부모로서의 OS가 인스톨 되면서 업데이트가 되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성숙한 어른에게서 태어날 수도 있지만, 운이 나쁘다면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이가 번식이라는 권리를 행사한 끝에 그들에게서 태어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를 어른으로 만들어준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아이를 가진 부모들 중에는 가정폭력으로 아이를 학대하거나 살해하는 사람이 있으며, 도대체 왜 ‘마음 읽어주기’ 세대들은 애를 자신들과 똑같은 개차반으로 길러 공교육의 현장을 짓밟고 선생님들이 교직을 내려놓거나 자신의 목숨을 끊게 만들기까지 한다는 말인가? 또한 왜 인류는 그동안 아이를 낳으면서 부모가 되었는데도 역사 속에서 전쟁과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났단 말인가? 아이는 부모를 어른으로 만드는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이토록 많은 역사 속 사건들이 차고 넘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부의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아이를 낳는 것, 아이가 없으면 훗날 후회할 것 같다고 그냥 낳는 것은 부부가 스스로의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고 아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온 인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의미한다. 아이라는 '제3의 변수'를 투입해 관계를 강제로 유지하는 것은 어른이 되는 ‘성숙’이 아닌, 그저 문제 회피에 지나지 않음이다. 진정한 성숙은 결혼 여부(與否), 아이의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他人)을 수단으로 삼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갖고 책임을 지는 것이 진정한 성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타인이라 함은 아이만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고 비혼과 비출산의 삶을 선택한 이, 미혼인 이 역시 포함된다.

 

◈◈◈

 

부부의 사이가 소원해져도 아이 때문에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버틴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부부 사이의 문제를 해결한게 아니라 그저 그 문제를 아이의 어깨 위에 옮겨놓고 네가 대신 이 무게를 견디고 살아달라는 협박과 강요에 불과하다. 이는 <외로움의 무게>에서도 충분히 말했는데, 아이는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끌려왔던 초대되었던 결국 문을 열어주기로 결정하고 아이가 깃들 몸을 만든것도 부모인 만큼,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절대 대등한 거래가 아니며, 그렇기에 부모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초대한 자로서의 품위 있는 책임을 보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의 문제를 아이에게 전가하는 것은 결코 초대장을 보낸 이로서 품격 없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또 하나의 존재이자 고유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비루한 결혼생활을 이어주기 위해, 나의 못 다한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내 노후를 책임져줄 존재로서 그를 세상에 패대기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행위인 것이다. 그런 이를 두고 감히 ‘어른’이 되겠답시고 교구로서 그를 이용하려 하다니, 매우 가증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아이는 부모의 도구가 아니다. 투자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초대한 자가 초대객이 파티장에서 먹고 마시고 즐긴 값을 청구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랬다간 그 파티의 주최자는 만인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망신을 받을 것이며, 그의 다음 초대에는 그 누구도 응하지 않으며 뒤에서 비웃음과 함께 그를 씹어댈 것이다. 왜 이 간단한 이치가 부모와 자식 간의 윤리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

 

비출산과 출산보류(出産保留)를 설명하기 위해 위의 긴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비출산은 위에서 언급했듯 삶을 경험하면서 어떤 존재를 존중하는 마음 속에 그를 세상에 초대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의 선택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출산보류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비출산은 비혼, 딩크로 볼 수 있고, 출산보류는 미혼, 환경과 여건에 따른 출산 미루기 혹은 포기라고 보면 설명하기 쉽다. 종종 딩크라고 했으면서 어느날 갑자기 아주 늦은 나이에 더이상 늦었다간 정말 아이를 갖지 못할 것 같다고 뒤늦게 출산 막차를 타서 노산(老産)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오는 이들이 있다. 분명 딩크라고, 인생을 즐길것이라고, 자신은 아이를 낳을 여건이 되지 못해 아이를 포기한다고 제각각의 이유를 설명하며 자신의 인생관을 자랑하고 매일같이 부부 둘만의 즐거운 삶을 전시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품에 아이를 낳고 나타나는 것이다.

 

당연히 딩크라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궁금할 것이다. 질문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들의 답변을 듣고 있자면 한결같이 이렇게 답한다.

 

“나중에 후회할까봐.”

“그래도 아이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이제는 가져도 될 것 같아서.”

“부모님이 원하셔서.”

 

말이 안되는 이유들만 잔뜩 나온다. 단단한 신념이라는 것은 외압에 의해 꺾이지 않는다. 그들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결정을 꺾은 것은 불안과 외부에서 오는 압박에 의한 결정 번복이였다. 그럼 왜 그들은 이 결정을 번복하기로 한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사실 아이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원하는 마음보다 다른 것을 우선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것이 미혼 시절의 자유로운 삶을 기혼이 되어도 동일하게 누리고 싶은 욕심이거나 마음의 준비 혹은 물질적인 이유로 출산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방학숙제라는게 있다. 보통 나는 방학을 시작함과 동시에 항상 방학숙제를 같이 시작해 방학이 끝나기 전 여유있게 숙제를 끝내놓고 남은 시간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 방학이 임박해감과 동시에 친구들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발등에 불이 떨어져 벼락치기로 방학숙제를 하고 있다며 피눈물을 쏟고 있는 것이다. 출산보류자는 이 방학숙제를 미룬 친구들과 같았다.

 

방학숙제는 출산과 비출산을 심사숙고 할 권리와 그에 들어갈 시간을 의미한다. 방학숙제를 빨리 하던 늦게 끝내던간에 그 방학숙제를 출산으로서 제출할지, 비출산으로서 제출할지는 숙제를 하는 학생의 자유인 것이다. 방학숙제를 방학 전에 끝낸 이는 젊음과 가임기라는 방학기간 동안 남은 시간을 자유롭게 쓰며 초조해하지 않는다. 빠르게 끝내던 늦게 끝내던 이미 방학 전에 끝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학을 최대한 즐기고 있었음에도 방학숙제를 병행하지 않은 이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그러나 방학숙제라는 것은 긴 방학기간을 감안해 마련된 과제이므로 보통의 숙제보다 양이 많다. 그걸 몰아서 며칠만에 전부 해치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능하더라도 약간의 편법이 동원된다. 답을 찍던, 누군가에게 같이 해달라 부탁하던, 이미 방학숙제를 한 친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네 숙제 좀 보여달라고 하던 말이다. 그렇게 완성한 벼락치기 방학숙제는 엉성하기 마련이다. 방학을 즐기느라 방학숙제를 하기 싫었다면 그냥 방학숙제를 제출하지 않고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 좀 나고 성적을 깎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방학숙제를 벼락치기 하는 이들은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나기도 싫고, 점수를 잃고 싶지도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두마리 토끼를 다 잡고싶어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도둑놈 심보일지도 모르겠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방학숙제 = 출산과 비출산을 심사숙고 할 권리와 그에 들어갈 제한된 시간

● 방학숙제를 하는 학생 = 출산과 비출산을 저울질할 개인

● 방학 = 학생(=개인)에게 주어진 고민과 결정의 시간

● 방학숙제 점수 = 비혼과 비출산이 인생에 미칠 영향과 결과

● 방학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 = 결정을 내린 개인의 후회

● 벼락치기 = 후회하기 싫은 마음과 인생에 미칠 영향과 결과를 감당하고 싶지 않은 나약함

● 방학숙제 제출 = 비혼과 비출산의 결정

 

그러니 비혼과 딩크를 출산보류자와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동류(同類), 동종(同種)으로 분류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볼 수 있다. 결과가 같아보인다고 그 결과로 향하는 과정이 똑같지도 않을뿐더러, 긴 시간동안 심사숙고한 이의 결과물과 발등에 불이 떨어져 벼락치기를 한 이의 결과물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냥 결과물을 제출한 것만 동일한 것이지, 결과물 역시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러니 채점 후 나오는 결과물에 대한 점수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숙제를 하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여 스스로 답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답을 써내린 이의 결과물과, 단지 혼이 나지 않고 싶어서 혹은 방학숙제 제출에 따른 점수만을 갖고싶어 대충 시간에 쫓기며 엉성하게 답을 찍거나 그럴싸하게 만드는데 급급한 이, 남의 숙제를 보고 베낀 이의 결과물이 어떻게 같을 수 있단 말이냐는 것이다. 이는 그 결과물을 들이댄 후 자신의 결과물에 대한 뜻풀이를 해보라 하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전자와 같이 자신이 직접 고민해 답을 내놓은 이는 쉽게 뜻풀이를 할 수 있고 수식을 세워 보여줄 수 있으나, 후자의 벼락치기 비자발적 집단은 뜻풀이를 할 수 없다. 그저 빌려온 답, 남에 의해 강요된 답, 불안해서 찍었을 뿐인 답을 제출했기 때문에.

 

그리고 과제를 제출하고 받은 점수에 대한 만족이 자발적 비혼과 자발적 딩크 부부, 자발적 유자녀 부부인 것이며, 점수에 대한 불만족이 미혼과 비자발적 딩크, 비자발적 유자녀 부부인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불만족이 르상티망과 샤덴프로이데, 자격지심으로 발현되며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이나 자신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 이에 대한 공격과 시기심, 질투 등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어른’이 된 성인과 나이가 차서 ‘성인’은 되었으되 어른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출산과 출산보류 역시 이 기준을 두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비출산이라는 결정 속에 출산보류의 미혼과 기혼이 함께 포함되어 있기에 이것 역시 한번쯤은 파고들어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느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 비출산은 정말 다 똑같이 삶 속에서 심사숙고 끝에 이 세상에 아이를 초대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들인가? 아니, 그것도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결과값이 같다고 과정이 똑같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출산 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 이건 그냥 결과다.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모두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비출산은 나 한몸 살기도 벅차서, 내 인생을 즐기고 싶어서, 혼자가 편해서와 같이 고민의 주체와 결과의 수혜자가 ‘나’, 즉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비출산으로 인해 책임질 존재가 내게 딸려오지 않기에 그에 대한 편리함을 내 삶 속에 온전히 누리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함으로서의 비출산을 선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은 삶 속에 공허함과 외로움이 느껴지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다가왔을 때 자신의 선택인 비출산을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에 해당하는 비출산은 비출산의 주체와 결과의 수혜자가 남, 즉 ‘타자(他者)’를 향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겪었던 기쁨과 슬픔을 저울에 올리고 자신이 초대한 존재를 온전히 부양하며 그가 살아갈 100년을 보장할 수 있는지, 그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것을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이들은 삶의 무게,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어떤 존재에 대한 배려, 생명에 대한 경외심(敬畏心), 의무와 책임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비출산을 결정했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외로움이던 공허함이던 그것을 감당하고자 마음을 먹었고, 그에 따라 딸려오는 부산물로서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인생을 누리는 것 뿐이다. 이들의 결정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정말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쉽게 뒤집힐 수 없다. 그 어지간한 일이라는 것은 보통 배우자가 정말 존경할만한 사람이라 ‘이 사람과의 사이에서라면 태어난 존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확신이 든다던가, 갑자기 천지가 개벽해서 세상이 낙원이 되어 태어난 이가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수준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말한다.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기에 신념에 의한 비출산을 결정한 이들은 흔들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하지만 이렇게 비출산을 결정한 이들을 두고 ‘이기적이다’ 라고 하는 출산주의자들도 존재한다. 그들의 논리인 즉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이 좋은 세상을 누리게 해주기 위해 누군가를 이 세상에 낳아 초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데이비드 베나타(David Benatar)라는 남아공의 철학자의 주장을 가지고 반박할 수 있는데, 물론 윤회(輪廻)와 인연(因緣) 그리고 업보(業報)의 법칙에 따라 태어나는 존재는 낳으려는 이와 전생의 업보와 관계를 타고 태어난다. 그러나 그 존재가 태어나는 것을 결정하고 승인할 권리는 온전히 부모에게 있으며 아이가 태어나고자 한다 해도 부모가 승인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몸을 타고 육체에 깃들어 이승에 태어날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은 비대칭적인 관계이며 부모는 업보에 따른 인연을 여기서 끊을지, 더 이어갈지를 결정할 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아이는 그저 그들의 결정을 따를 뿐인 것이다. 그런 비대칭적인 관계 속 아무런 승인권을 갖지 못한 아이를 도대체 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팀원으로 낳아 세상에 던져야하며, 이 좋은 세상을 누리라고 강요해야 한단 말인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태어난 아이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노동에 가담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는 즉 아이가 태어난 세상과 태어나기 전의 세상이 좋은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대체 왜 그 좋지 못한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강요해야 하며 그것이 이타적이라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솔직하게 ‘내가 아이를 원해서 널 낳았다’ 라고 인정이라도 하면 되지, 왜 그걸 아이를 위한 이타적 행위라고 감히 포장하는 기만을 저지르느냐는 말이다.

 

또한 이 좋은 세상을 누리라고 태어나게 하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세상을 좋게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아이를 낳은 부모인 것이며, 태어난 아이가 살아보았을 때 부모와 달리 세상을 좋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 것을 감사히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왔으며 ‘낳음당하다’ 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에게 좋았다고 해서 남에게까지 좋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걸 쉽게 표현하자면 ‘민트(Mint)’를 두고 말하면 된다. 민트 초콜릿을 좋아하는 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민트 초콜릿이 시중에 판매되는 것이겠지. 그러나 민트 초콜릿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민트 초콜릿을 먹으면 꼭 치약을 입에 머금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인생이라는게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주어져서 기쁠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살면서 민트 초콜릿이 좋아질수도 있고, 민트 초콜릿이 싫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나와 같이 모두 무조건 민트 초콜릿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민트 초콜릿을 입안에 쳐넣어버리는 것은 이타적이지 않다. 출산주의자들이 출산을 신성시하며 비출산주의자를 악(惡), 무책임, 이기적이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그들의 결정을 비난하는 것과 아이를 낳아 그가 낳음당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것이라 넘겨짚는 것이 바로 민트 초콜릿을 입안에 쑤셔넣는 행위라는 것이다. 민트 초콜릿을 들고 건넬 수는 있다. 그것이 출산을 통한 아이의 탄생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무조건 민트 초콜릿을 좋아할 것이라 단정짓는 것은 폭력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비출산만을 옹호하고 출산을 악으로 규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출산 역시 아름다운 것임을 인정한다. 다만 그 출산이 ‘나’를 위한 것임을 인지하고, 그 책임을 아이에게 돌리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출산을 결정하였을 때 초대한 이에게 물질적, 정서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이를 세상에 초대한 것이 되겠으나, 그냥 때가 되어 낳는다던가 위에서 말한 아름다운 세상이 어쩌고 하는 말같지도 않은 핑계 속에 낳아 패대기친 이들은 결코 옹호할 수 없으며 스스로를 옹호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전자의 사람들과 다르게 자신의 출산을 훈장처럼 생각하고 비출산을 선택한 이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결혼과 출산을 비혼과 비출산주의자에게 권하며 그들을 은근히 깎아내리고 으스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두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아이를 안 낳아서 우리 애가 나중에 세금도 많이 내야하고 너무 짊어져야 하는게 많아! 다들 너무 이기적이야!”

 

웃기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결정으로 아이를 세상에 패대기쳐놓고 아이를 위하는 척 뒤늦은 수습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비혼과 비출산주의자들은 납세의 의무를 다함으로서 그들이 내는 세금으로서 출산한 이들의 아이가 무상교육과 무상교복, 무상급식 등을 제공받을 수 있는 환경에 일조하고 있다. 그들이 왜 무임승차자라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연말정산으로 아이가 있는 가정에 세금을 공제해주는 제도가 있는 만큼, 비혼과 비출산주의자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해야하지 않나?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두고 의무를 다한 고고한 존재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주변인들도 그걸 교정해주며 그의 더닝크루거 현상(Dunning–Kruger effect)에 휘말려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는지 서로 눈빛만 교환하며 그가 보지 않는 틈을 타 피식대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 지인의 아이는 타인의 비출산이라는 선택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그 부모가 이기심 속에 아이를 세상에 패대기쳤기에 부모의 외로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허함을 대신 짊어지게 된 것이다. 그 아이의 등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타인이 아닌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의 부모였던 것이다. 어디서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은근슬쩍 남에게 화살을 돌린단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쾌락에 대한 책임조차 지려고 하지 않는 것 뿐이다. 아이의 원망과 비난을 감당할 용기조차 없는 것이다. 정 궁금하면 집에 가서 아이에게 이렇게 물어봤어야 했다.

 

“태어나보니 어땠어?”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생명의 무게를 아는 이는 쉽게 세상에 누군가를 초대할 수 없다. 그가 살아갈 100년과 초대한 자신이 없이 살아가야 할 시간,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미안함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들은 그 무게만큼이나 신중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중한 이들이 결정한 비출산을 두고 출산보류자와 한데 묶어 판단하는 이들의 모욕을 보고 둘 수 없었다. 또한 신중함 끝에 초대장을 쓰지 않기로 펜을 꺾고 종이를 찢어버린 이들을 이기적이라느니 패배자라느니 하는 프레임 속에 가두고 자신들의 편협한 시선 속에서 판단하며 비웃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그들의 절제되지 못한 욕정과 충동 속에 결정되어 낳음당한 이들을 동정하고 그 밑에서 자라게될 이들의 미래를 걱정해주고 싶을 뿐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것이 있다. 능력이 부족한 이는 자신의 능력을 맹신하고 능력 밖의 것에 대해 근거없는 자신감을 품기 마련이다. 어쩌면 비출산을 두고 으스대는 이들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비웃는가? 왜 비난하는가? 왜 이기적이라 손가락질 하는가?

돌을 던지기 전에 잠시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돌을 쳐다봐야 할 것이다. 그 돌이 자격지심으로 만들어졌는지,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후회가 들어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삶이 후회되는 마음에 남 역시 나처럼 아프길 바라는 마음에서 돌을 들었는지 말이다.

 

또한 남에게 자신이 간, 결코 되돌릴 수 없고 되돌아 갈 수 없는 길로 오라고 손짓하는 의도가 어떤 마음에서 나왔는지도 스스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남이 정말 나처럼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등불을 들고 내가 걸어온 길과 택하지 않은 길을 비춰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내 선택을 정당화하고 후회하는 마음을 지우고 싶은 마음에 남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부러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시기와 질투의 결과인지. 등대와 등불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덫과 족쇄가 되고 싶은 것인지.

 

그리고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물어봐야 할 것이다.

 

“태어나보니 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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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출산과 출산보류자는 다르다: 고라니 목장

나 아닌 타인과 대화를 하다보면 새로운 것을 알게된다. 내가 세상을 보는 시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점을 빌려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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