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연애(戀愛)를 하고 그 끝에 결혼(結婚)에 골인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렇게 맺어져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잘 풀리지 않는 결혼생활과 그 속에 포함된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며 그토록 사랑했던 것 같은 연인 시절의 모습과 달리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고 결혼을 후회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사랑해서 한 결혼인데 왜 서로의 멱살을 잡고 지옥으로 다이빙을 하고 있는걸까?
할말 많은데 귀찮으니까 이전 글에 이어서 이야기 하겠다.
◆ 진리 탐구 메모 https://shearestis.tistory.com/98
진리 탐구 메모
트리니티 시스템 (The Trinity System: Providence)이건 어릴적부터 내가 감으로 느껴오던 것을 2025년 12월 4째주 일주일 내내 감기에 걸려 누워있다가 할 일이 없어서 대충 끄적여 언어화한 낙서임.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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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형태 정리 https://shearestis.tistory.com/99
사랑의 형태 정리
사랑의 4단계 위계1. 최선의 사랑 • 정의: 서로가 서로의 진정한 이해자이자 등을 맞댈 수 있는 전우/파트너.• 특징: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무언가를 해주는 것에 대해 손해라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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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https://shearestis.tistory.com/117
사랑을 사칭하는 시대
‘결혼은 타이밍이다’‘혼기에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있다’ 흔히들 어른들이나 기혼자들이 해주는 말이다.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고, 그것이 시기에 잘 맞물리면 결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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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리만 남고 의무는 내팽개친 시대 https://shearestis.tistory.com/123
권리만 남고 의무는 내팽개친 시대
농담으로라도 듣기 싫은 말이 있다. “아무튼 해줘.”“몰라, 그냥 해줘”“그냥 줘.”“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줘.”“아무 노력 없이 갖고싶다.”“노력 없이 이기고싶다.” 듣기만 해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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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24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오늘도 싱글벙글(은 무슨) 좀비같은 걸음으로 아침 요가를 하러 가는 길에 버스 옆면에 붙은 ‘결혼정보회사’ 광고를 봤다. 마음속으로 ‘싱글이세요? 전 벙글이에요.’ 같은 어디서 주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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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https://shearestis.tistory.com/128
소꿉친구 커플의 환상
동창 중에 결혼 소식이 들려오는 친구가 있다. 솔직히 좀 놀라웠다. 이 친구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명품을 좋아해서 엄마의 가방을 가져와 자랑하듯 걸치며 이건 무슨 브랜드라고 고작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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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비혼을 두고 이기적이라 정의하는가 https://shearestis.tistory.com/135
왜 비혼을 두고 이기적이라 정의하는가
기혼 유자녀인 지인과 대화한 적이 있다. 어쩌다보니 그의 심각한 고민을 듣게 되었고 내 나름대로 괜찮은, 미래지향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던 기억이 난다. 리스크가 있지만 지인이 고민중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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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관계와 양자역학 https://shearestis.tistory.com/138
인간관계와 양자역학
인간관계는 마치 양자역학과 닮아있다. 누군가 먼저 타자(他者)를 향해 관심을 보이고 관찰을 하며 그 삶을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정의한다면, 타자 역시 자신을 관찰한 이를 향해 관심을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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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의와 매너 그리고 배려 https://shearestis.tistory.com/143
예의와 매너 그리고 배려
강아지 털이 너무 많이 자랐다. 눈썹마저 길게 자라 꼭 호호 할아버지처럼 축 쳐지고 마치 테디베어처럼 보이게 되었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길 이 때가 제일 귀엽다고 한다. 그와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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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평면이 아니다 https://shearestis.tistory.com/152
사랑은 평면이 아니다
분명 휴식시간을 이용해 인터넷을 하는 것은 휴식을 취함과 동시에 뭔가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가 있나 찾아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매번 배움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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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연애결혼이 보편화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긴 역사 속에서 황족(皇族), 왕족(王族), 귀족(貴族)과 같은 지배계급(支配階級)부터 평민(平民)과 노예(奴隷)같은 피지배계급(被支配階級)에 이르기까지, 결혼이라는 남녀의 결합 속에서 무언가 실리(實利)와 실익(實益)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정략결혼(政略結婚)이다. 서구사회를 기준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쯔음에서야 연애결혼(戀愛結婚, Love Marriage)이라는 것을 보편적인 결혼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8세기,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와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사상이 퍼지면서 ‘인간이 스스로 행복을 결정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 싹텄고, 다양한 소설들이 ‘사랑 없는 결혼은 불행하다’ 라는 공식을 정립시켰다.
이어서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세상이 달라졌다. 그에 따라 부모에게서 토지를 상속받고 가업을 이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가 요구하던 정략결혼을 거절하고, 산업화에 따라 개인이 직접 어딘가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옴에 따라 연애결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연애결혼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도 여전히 상류층의 정략결혼은 물론이고 먹고 살기 빠듯한 사람들이 자신보다 조건이 좋은 이에게 자식을 팔아먹듯 결혼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19세기를 휩쓸었던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도 분명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부부 간에 존중과 예의를 추구하던 시대를 넘어 또 하나의 조건으로서 ‘사랑’이 자리잡게 된 혁명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이전의 시대에서는 부모가 정해주는 이와 약혼을 하고 나이가 차서 결혼을 함에 따라 후계자를 낳은 뒤 각자 원하는 상대와 불륜을 하는 것을 묵인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전의 시대에도 배우자가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주 천박한 일이며 그에 따른 패널티 역시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부부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된 만큼 연애는 결혼의 필수요소로서 작용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불륜(不倫)과 외도(外道)가 얼마나 추잡하고 저열하고 더러운 것인지에 대한 평가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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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시대에는 점점 연애결혼이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람들은 수동적이게 누군가가 정해주는 상대와 맺어지는 대신 스스로가 호감을 느낀 이성과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 없는 결혼으로 인해 많은 부작용이 있었던 구시대와 달리, 이제는 인류에게도 멈춰있던 사랑의 권리와 자연선택(自然選擇)의 법칙이 다시 주어진 것이다. 가문이나 부모님, 주변, 공동체의 강요와 압박 속에서 더이상 원치 않는 상대와 맺어지고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번식의 의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주어졌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주어진 자유 속에 마냥 행복만을 누리지는 못했다. 사랑으로 시작한 연애와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결혼이 존재했기 떄문이다.
인간은 로맨스(Romance), 사랑 이야기에 열광한다. 그것이 허구의 사랑이던 실제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이던 상관없이, 인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 전해지는 많은 사랑 이야기가 여전히 시대를 초월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의 본능은 ‘사랑’이라는 것을 추구하며 그렇기에 누구나 그 사랑을 원함과 동시에 아무나 갖지 못하는 진정한 사랑을 동경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섭리의 근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고작 3차원의 물질계에서 섭리를 바라보며 이것이 섭리다 라고 말하는 것은 빙산의 끄트머리만 보고 전체를 논하는 것과 같은 수준일지 모르나, 분명 섭리 속에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인간은 섭리에 의해 존재를 허락받은 이들 중 하나이니만큼,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근원에 닿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사랑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기에 그토록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사랑을 하고 원하는 이와 맺어질 권리와 자유를 손에 쥐었음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불행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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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연애와 결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자신과 배우자의 관계 속에 ‘사랑’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말이다. 물론 진정 사랑으로 맺어진 이들도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말 많은 이들이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음에도 자신이 사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럼 대체 사랑이 무엇이길래 21세기의 많은 이들이 자유연애와 그를 통한 결혼을 했음에도 그 속에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것은 프네우마(Pneuma / πνεῦμα), 우시아(Ousia / οὐσία), 로고스(Logos / λόγος)의 균형과 조화 속에 발현되는 온토스(Ontos / Ὄντος)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인식하고 그에게 호감을 품고 열정으로서 그를 사랑하고자 하는 프네우마,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감정과 인식 그리고 기억 자체가 우시아, 그 사랑을 느끼고 지키며 키워나가기 위한 이성이 로고스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온전히 균형을 이룰 때 그 조화의 결과물로서 사랑이라는 온토스가 발현되는 것이다. 프네우마를 타협한다면 사랑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사라진다. 우시아를 합의한다면 그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한다고 여길 수 있는 누군가를 골랐을 뿐이다. 로고스를 타협한다면 사랑에 있어 가성비를 따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타협과 합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랑을 타협과 합의로 얻으려 했으니 당연히 결혼이 불행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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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에게는 딸이 있다. 그 딸은 결혼을 해서 남편이 생겼는데, 그 남편이 지인에게는 사위가 된다. 지인은 딸만 있는 사람인데, 주기적으로 온 가족이 가족여행을 함께 떠나고는 했다. 이제 그 자식들 중 장녀가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가족여행에서 장녀는 빠질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았다. 장녀는 자신의 남편 되는 이를 당연스럽게 항상 가족여행에 매번 데리고 참가했으며, 그에 따라 지인의 사위는 자연스럽게 가족 여행 중 운전을 도맡고 무거운 짐을 옮기며 힘 쓰는 일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본인들은 사위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다정한 장인 장모인 줄 철썩같이 믿고 있으며, 그들의 가족에 사위가 들어와 가족이 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 틀린 발상이였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만약 사위가 아니라 며느리의 포지션이였다면? 며느리가 시부모와 시댁 식구들을 모시고 매번 가족여행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며느리가 매번 가족여행의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하고 여행스케쥴을 계획하며 시부모와 시댁식구의 취향과 컨디션을 파악하며 그들을 보필하며 여행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이 얼마나 끔찍하고 숨이 막히는 상황이란 말인가! 인터넷이나 TV에서 종종 다루는 전형적인 시집살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식으로 며느리를 하녀처럼 대한다고 하면 지나가던 사람을 잡고 물어봐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시댁과 남편 되는 이를 비난할 것이다.
지인의 집은 위에서 말한 며느리와 남편의 관계에서 며느리를 사위로, 남편을 아내로 치환하기만 하면 된다. 지인은 자신들이 사위를 ‘머슴’이나 ‘몸종’처럼 부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으며, 그집의 장녀이자 사위의 아내 되는 이 역시 자신이 남편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부려먹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내로서 남편에게 양해를 구했다고 지인은 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내와 처가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보통사람은 그리 쉽게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을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나는 사실 이런 자리가 불편하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말이 들려오는 상황 자체를 만들어선 안 되는 것이다. 시댁에서는 남편이, 처갓댁에서는 아내가 중간에서 배우자를 위해 악역을 자처하고 방패가 되어주는 것이 정답인 것이다. 애초에 ‘네’ 라는 답변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의사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압박을 넣는 행위라는 것을 진정 모르는 것인가?
그래서 이 지인의 이야기와 그의 변명을 듣고 있자니 떠올리게 되었다. 지인의 딸은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사랑한다면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이를 누군가가 하찮게 여기고 부려먹는 상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딸 되는 이는 아내로서 남편을 보호하지 않고 가족여행 속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돌쇠처럼, 부모님에게 대신 효도해줄 하인처럼 부려먹는 것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대 인기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라는 작품이 있다.
그 속에 나오는 양관식은 오애순을 무척 사랑했다. 새침한 애순이를 대신해 애순이의 양배추를 팔아줬고, 애순이가 야반도주를 하자는 말에 따라 무작정 손을 잡고 함께 달아났다. 시대의 한계에 따라 애순이가 폭력적이고 애 딸린 홀아비에게 팔려나가듯 시집을 가게 되자 눈물을 뚝뚝 흘려대며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가져와서는 애순이를 자신에게 시집보내라고 그 순하고 우직한 사내가 난리를 피웠던 것이다. 시 한줄 모르는 순박한 청년이 사랑 그 하나를 위해 노스텔지어를 외워 쩌렁쩌렁 밤하늘에 대고 외쳤다. 창창한 미래를 내려놓고 오애순의 남편으로 사는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 시집살이로 인해 고생하는 애순이를 위해 묵묵히 기다렸고, 그의 상처가 헤집어지는 것을 보자 바로 아내의 손을 잡고 뛰쳐나와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 셋방에서 자식과 함께 살아가며 모진 뱃일을 하며 견뎌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것을 주고서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 아내 앞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내가 바로 양관식이다.
그럼 오애순은? 아무것도 없는 천애고아 오애순이 좋다고 쫓아다니는 그의 미래를 위해 눈물을 참고 그를 밀어냈다. 그럼에도 끝끝내 그 옆자리가 아니면 안된다는 이를 결국 받아주고 모진 시집살이를 견뎠고, 함께 그 집을 뛰쳐나와 셋방에서 살면서도 싫은소리 한 마디를 안 하며 남편을 믿고 의지했다. 자존심 하나로 살던 이가 남편의 축 쳐진 등을 보고 자신의 할머니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술을 씹어댄 끝에 할머니의 쌈짓돈으로 그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할 일 없는 작은 배 한척을 남편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꽃같던 문학소녀가 양관식의 사랑 속에 아름드리 나무처럼 강해졌다. 관식의 손을 잡고 세상의 모진 풍랑을 견디고 제 자식 앞에서는 항상 죄인처럼 싫은소리 하나 못하던 여자가, 제 자식들이 아버지의 체면을 깎는 폭언을 뱉자 “감히!” 라며 남편의 앞에 당당히 서서 그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사랑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무엇 하나를 들고와 이것이다 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위에서 말한 내 지인의 딸이 사랑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양관식과 오애순을 들고 와서 그를 부정할 것이다. 그는 사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이를 골라 적당히 연애를 했고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했다. 그에 따라 적당한 나이가 되자 남편 되는 이와 결혼했고, 그는 여전히 자신이 사랑을 해서 사랑 속에 결혼한 것이라 착각하며 남편을 종처럼 부리고 있다. 이건 절대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이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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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갈등, 장서갈등으로 인한 이혼 시에는 시댁이나 처갓댁의 원흉이 되는 인물을 유책인물로 고소할 수 있다. 이것은 그만큼 부부의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외부 요인으로서 시댁이나 처갓댁같은 양가 어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시댁의 악역은 남편, 처갓댁의 악역은 아내가 맡는다면 충분히 고부갈등과 장서갈등은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는 범위의 문제다. 자식은 천륜이라고, 좀 다툰다 하더라도 언젠가 화해할 수 있지만 사위와 며느리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당신이 좀 참아.”, “어른들이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어?”, “당신만 참으면 문제 없어.” 와 같은 식으로 배우자에게 인내를 강요하고 문제를 회피한다.
그럼 대체 왜 참으라고 할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제 부모님에게 자신의 배우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위에서 말한 양관식과 오애순 부부를 떠올려보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그들은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부모님을 굳이 상처입히거나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배우자를 보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한참 구박을 받은 배우자와 집에 돌아와서 그 기분을 풀어주려 무릎꿇고 애걸복걸 하거나 애교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가의 명품이나 갖고싶었던 물건을 사주는 식으로 기분을 풀어주려 하기도 한다. 이건 주로 명절에 제사를 거하게 지내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종종 보이는 일인데, 힘들게 명절동안 제사음식을 만든다고 부엌에서 내내 고생하고 골병이 든 아내에게 명절이 끝날 때마다 명품백을 선물하거나 명절 전에 지우고 떼어냈던 네일아트를 보상이라도 받듯이 더 화려하게 다시 받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현찰로 거액을 건넨다던가.
하지만 이건 배우자를 사랑해서 그가 견뎌야했던 모욕과 수치, 부당함을 보상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애초에 일이 벌어진 뒤에 수습하며 보상을 논할 것이 아니라 아예 보상을 해야할 일을 만들지 않았어야 한다. 이미 배우자의 몸과 마음은 상할대로 다 상했는데 어떻게 몸과 마음이 다치기 전의 상태로 완벽히 되돌릴 수 있겠는가? 이는 그저 함부로 던지고 막 쓴 스마트폰이 고장나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불편할 때 AS센터에 방문해서 수리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애초에 그 물건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면 함부로 내던지지도, 고장이 나도록 막 다루지도 않는다. 그러나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지만 나의 편리함을 위해 구매한 물건이 조금 오래되면 사람들은 익숙함 속에 침대에 던지고, 물 묻은 손으로 만지고, 실수로 음식을 떨어뜨려도 옷소매로 슥슥 닦고 대충 쓰다가 점점 하나 둘 삐걱거리는 것 같아도 큰 불편함이 없으면 무시한다. 그러다 결국 버티다 못해 고장이 나서 자신에게 불편함이 느껴지면 그 물건을 들고 수리센터로 향하거나 아예 새 제품을 구매해 바꾸기도 하는데,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어떻게 물건에게 하듯 망가지면 망가지는대로 방치하고, 몸과 마음이 다쳐도 나중에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로 그가 혼자 고난을 감당하게 방치하고 자신은 쏙 빠져 그 상황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이냐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절대 사랑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대체 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굳이 결혼까지 해서 결혼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를 만들고 해결조차 하지 않은 채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쏙 빠져 방관자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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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결혼한 부부들을 데려다놓고 배우자와 떨어져서 혼자가 되게 만든 뒤 그를 인터뷰한 조사 데이터가 있다. 함께 있을때에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러우며 배우자를 사랑한다 말한 그들은 본심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그와 동시에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한 조사결과가 매우 많았다. 또한 배우자의 앞에서는 그의 외모에 만족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가 듣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자신의 배우자가 좀 더 나은 사람, 더 매력적인 사람이기를 바란다는 속내를 드러내었다. 뿐만 설문조사에 대해 많은 부부가 ‘우리는 행복하다’ 라고 답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글 검색창에는 섹스리스(Sexless)에 대한 이야기가 불행한 결혼보다 더 많이 검색되곤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판이나 유튜브 같은 곳에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면 그 댓글창에는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남녀의 사이에 하나씩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불만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글들이 섞여있기도 하며, 아이는 너무 소중하지만 배우자는 싫다 라는 진심을 꺼내놓는 이도 있다. 때로는 다음생에는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남이 시켜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연애를 통해 혹은 소개나 결혼정보회사 같은 곳을 통해서 누군가를 만났고, 본인이 선택해서 상대와 결혼한 것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본인이 선택해 만난 사람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왜 자꾸 이런 부부간의 불협화음이 나오는 것일까?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은 채로 결혼했기 때문에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랑하니까 결혼한게 당연하지 않은지, 연애를 했는데 어떻게 안 사랑할 수 있는지, 사랑했는데 사랑이 식어서 그런게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전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식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확장되는 것이다. 식을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호감이나 좋아하는 것에 그치는 감정을 착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내겐 강아지가 있다. 산책을 할 때 강아지의 목에 채우려고 일부러 주문제작한 맞춤 목걸이와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하네스를 비싸게 주고 사서 강아지에게 채운다. 산책이 끝나면 항상 발을 닦아주는데, 현관에서 강아지의 목걸이와 하네스를 벗기고, 그걸 바구니 안에 휙 던져넣는다. 그 뒤에 겉옷을 벗어 현관에 던져놓고, 강아지를 안아서 바로 욕실로 데려가 발을 박박 닦은 뒤 헹구고 수건에 잘 닦아서 내려놓는다. 신이 난 강아지가 우다다를 하며 의사표현을 하는 것에 응수하며 맞장구를 치다 강아지가 이제 흥분이 가라앉은 것 같으면 겉옷을 들고 옷걸이에 걸어놓는다. 나는 강아지를 사랑한다. 그와 동시에 내 강아지를 위해 구매한 목걸이와 하네스, 그리고 내 겉옷을 좋아한다.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목걸이와 하네스처럼 강아지를 던지지도 않았고, 강아지를 씻기기 전에 겉옷을 걸기 위해 현관에 강아지를 방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 강아지를 우선하느라 목걸이와 하네스, 겉옷은 방치되었다. 그렇기에 강아지는 사랑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좋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적령기에 만난 남녀가 타협과 합의 속에 맺어진 결혼을 두고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으니까 방관할 수 있는 것이다.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좋아한다’ 수준이면 충분히 방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랑도 아니고 그냥 호감이나 좋아하는 수준에 그쳤는데 결혼까지 이어가서 굳이 안 겪어도 되는 갈등을 겪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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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긴 역사상 처음으로 비혼(非婚)이라는 단어가 등장함과 동시에 결혼하지 않는 미혼(未婚)의 남녀가 처벌받지 않는 시대가 왔다. 이거 몇번이나 언급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이제 비혼이라는 것이 인생 속 하나의 선택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많은 인간들이 자신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결혼으로 인한 관계가 부담스럽다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대놓고 손가락질 하는 이도 줄어들었다. 굳이 맞지 않는 상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두고 골라서 ‘이정도면 되겠지’ 하고 마음속으로 타협하고 합의해서 결혼까지 해야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진정 사랑하는 상대도 아닌데 굳이 적령기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곤 하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나라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텐데…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나같은 것은 아니고, 나 역시 내가 굉장히 이레귤러한 쪽에 속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이레귤러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정보이기에 조금 조사해본 결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관성’에 따라 살아간다고 한다. 모두가 성공의 길이라고 하는 길을 걷고자 입시를 견디고 연애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적당히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면 만나고, 적령기 그리고 가임기가 지나기 전에 대충 그 시기에 만나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가 있어야겠지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살아가며 또 그렇게 늙는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 관혼상제(冠婚喪祭)를 통과하듯 정해진 루트를 하나씩 통과하며 인생의 스탬프장을 관성적으로 하나씩 모으는 것이 그들의 삶이라고 한다. 물론 그 평범하고 단조로운 인생이 나쁘다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하나 숨어있다.
또 하나는 ‘정략결혼’이다. 자유연애결혼 시대에 무슨 정략결혼이 나오는가? 그런건 상류층이나 재벌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전혀 다르다. 일반인들도 정략결혼을 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타협과 합의’에서 오는 결혼이 그것이다. 과거의 정략결혼은 가문 간의 연합이나 재산 등을 증식하거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행해졌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남녀가 누군가에 의해 등이 떠밀려 사랑 없이 결혼을 하지만, 그들에게는 무언가 보상이 주어졌다. 재물과 권력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들 중에는 비록 혼전에 한번도 제대로 서로를 마주해본 적도 없지만 결혼 후에 차차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을 키워나가며 진정한 부부로서 거듭나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현대인의 자유연애 정략결혼은 다르다. 그들은 무엇을 얻기위해 결혼한다기 보다는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해서 결혼을 하려 하고, 자유연애라는 시스템을 이용해 상대를 물색한다.
이정도 외모면 아름답다고 할 순 없어도 직장이 안정적이니까, 학벌이 좀 딸리긴 하지만 내 얼굴에 저정도 미인을 만나려면 이정도는 어쩔 수 없으니까,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걸리기는 한데 본인의 능력은 출중하니까, 내 수준에 저 정도면 감지덕지니까 하는 식의 다양한 마음 속 타협이 현대인의 자유연애 정략결혼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가 아니라, ‘이정도면 뭐’ 에서 인생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랑은 유일무이한 것이어야 하는데, 있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애매한 마음과 그저 호감과 좋아함에서 그치는 수준을 두고 사랑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폭삭 속았수다>에 나오는 양관식과 오애순의 딸, 양금명과 그 첫사랑 박영범을 두고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분명 박영범은 양금명을 좋아했다. 그러나 대학 동기들이 자신의 앞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금명이를 욕하는데도 나서서 반박하지 않았다. 정작 금명이의 친구는 그 자리에 없는 금명이를 대신해 그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언성을 높혔는데 말이다. 어머니의 폭언과 어머니가 주는 물질적 풍요를 박차고 나올 정도로 사랑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살갑게 굴려 애쓰다 체를 하는 바람에 약까지 먹고 울먹대는데도 그는 금명이의 두 손을 잡기 위해 어머니를 잡은 한 손을 놓지 않았다. 금명이가 헤어짐을 통보했음에도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지 않고 금명이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와주길 바랬다. 그는 그렇게 양관식과 오애순의 진정한 사랑을 보고 그 속에서 자란 양금명을 잃었다.
과거의 정략결혼은 애초에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사랑은 빼고 대신 그 자리에 권력과 재물을 채워넣는다. 그걸 이미 알고 시작하니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어 오히려 삐걱대지 않는다. 부부 사이에는 존중과 예의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인간 대 인간, 거래의 상대로서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며 거기에 만약 본인들이 원한다면 사랑을 해도 되는 조건이니 역설적으로 더 안정적인 것이다. 이 구조를 설명하자면 정략결혼으로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이 프네우마, 정략결혼을 위한 가문 간 그리고 남녀 간의 이성적 거래와 계약이 로고스, 그리고 그들의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가 우시아에 해당한다. 그러니 비록 사랑은 아니라도 다른 형태로서 온토스 현상이 발현할 수 있으니 안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자유연애 정략결혼은 다르다.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를 두고 사랑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으니 서로에 대한 타협과 합의에서 오는 호감을 상대에 대한 열정으로 착각한다. 그러니 사랑의 기본 에너지로서의 열정인 프네우마가 결여된 상태로 시작한다. 이어서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그냥 있으면 좋고 아니면 아쉬운 정도의 상대를 두고 그 사랑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키워나가야 할 이유가 없기에 로고스 역시 작동할 이유가 없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한 관계에서 오는 사랑은 결코 뜨겁지 않고 그저 그런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이 우시아의 결여를 불러온다. 이러니 사랑이 발현될 수 있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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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제대로된 자유연애결혼과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유연애의 시스템을 이용한 ‘자유연애 정략결혼’을 다루고 있다. 제대로된 자유연애결혼이 뭔지 까먹었다면 스크롤을 올려 위에 가서, 아니면 넷플릭스를 키고 <폭삭 속았수다>를 정주행하면 된다.
현대의 일반인이 저지르는 자유연애 정략결혼은 어찌 보면 실패한 합병이자 투자라고 볼 수 있다. 결혼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를 가진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부부가 되고 가족을 꾸리는 것이다. 자아를 비워내야 비로소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다툼 속에 관계를 조율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결혼이라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의 시간, 막대한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고위험·고비용 투자 그것도 인생의 올인(All in) 투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결혼은 굳이 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을 굳이 만들어서, 그것을 부부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하는 과업이다. 그러니 이 정략적 합병과 위험한 투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수익이자 유일한 잭팟은 ‘사랑’일 수 밖에 없다. 사랑이 있다면 서로를 의지하고 위해주며 견딜 수 있는 문제들을, 사랑도 없고 그렇다고 재물이나 권력이 생기지도 않으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결국 서로 민낯을 보이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타협, 합의, 조건만을 챙기며 푼돈만 챙기려 하니 인생을 전부 걸어야하는 위험한 투자는 당연히 마이너스가 될 수 밖에 없으며 합병한 회사의 두 사장은 동업자로서 사이좋게 경영을 해 나가기보단 제 몫을 챙기려고 아웅다웅 다툴 수 밖에 없다. 투자금 회수는 커녕 뭐 대단한 이득도 없이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의무가 생기고 시댁이 생기며, 남편과 사위로서의 의무가 생기고 처가댁이 생겨버리니 부채(負債)만 잔뜩 생겨버리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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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무것도 없이 양관식과 오애순처럼 맨 주먹으로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게 진정한 사랑이냐고 물어오며 물질적 가치를 부정해야 하는가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물질이나 조건이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건 사랑을 지켜내고 키워내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사랑이 수단이 되어버린다면 결국 사랑도 물질도 둘다 잃게 될 뿐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물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뼈져리게 알고 있다. 그러나, 정말 물질이 중요하기에 더욱 진정한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가임기나 적령기라고 아무나 옆에있는 사람을 잡아 결혼한다고 만족할 수 있기엔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걸 알아버렸고, 사랑을 알고 있다. 가짜를 두고 진짜라고 우길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하다.
● 이스라엘의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Eva Illouz)에 따르면, 현대의 사랑은 자본주의에 잠식되었다. 현대인들은 조건을 통해 상대를 ‘쇼핑’하며 물색한다. 얼핏 보면 자유롭게 배우자가 될 이성을 찾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그저 ‘가장 손해보지 않는 매물’을 고르는 것이다.
●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에 따르면, 현대의 결혼 '각자도생의 방편'이라고 한다. 그는 결혼을 혼자 남겨졌을 때의 사회적·경제적 추락을 막기 위한 '방어적 계약'이라 정의한다.
● 프랑스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일부 비판적 학자들은 현대의 결혼을 '자기 경영의 실패'로 여기기도 한다. 현대인은 자신을 하나의 '기업'으로 경영하는데, 결혼은 두 기업의 합병(M&A)인데, 시너지(사랑과 사유)가 나지 않는 합병은 결국 구조조정(갈등과 방치)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사랑이 아닌 타협과 합의로 이뤄진 자유연애 정략결혼을 한 이들은 차라리 자신들의 결혼이 정략이였음을 인식하고 사랑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서로의 진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도 아닌 허상을 끌어안고 상대를 사랑으로 대하고 상대에게 사랑을 갈구하니까 존중과 배려가 아닌 이익을 추구하게 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해결의 첫 걸음이 시작된다. 알지 못하니까 계속 문제가 복잡해지고 꼬이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까지는 하지 않고, 상대방 역시 나를 사랑까지 하지는 않는다는걸 알아야 그와 진정한 사랑을 시도해보던 아니면 여기서 이 실패한 합작법인을 끝내고 현상유지를 하던 갈라서던 뭐라도 해볼 것 아닌가? 진실은 고통스러운 법이다. 하지만 거짓은 파멸을 불러온다. 그것이 지금이 아니던 어떻게서라도 진실을 외면한 대가는 반드시 다가오는 법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날아오는 공을 눈 감고 외면하는 대신 그 공을 쳐내려고 손이라도 한번 뻗어보는게 낫지 않을까?
사랑이 뭐냐 라고 물어보면 여전히 대답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 하고 물어온다면 적어도 후자에 대해서는 답할 자신이 생긴 것 같다. 내면의 프네우마가 빛나고 있는지, 그 빛이 우시아에 제대로 맺혀있는지, 빛을 인식할 수 있는 로고스가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현대의 자유연애 정략결혼: 고라니 목장
분명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연애(戀愛)를 하고 그 끝에 결혼(結婚)에 골인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렇게 맺어져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잘 풀리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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